십자가와 사랑의 실천 – 장재형목사

Ⅰ. 갈라디아서 6장의 배경과 율법주의의 문제

갈라디아서 6장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며, 이 편지를 통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교리에 휩쓸려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중심 진리를 재확인시키고자 한다. 갈라디아서는 초대교회 시절, 복음과 율법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혹은 복음은 율법의 멍에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해방하는지에대하여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서신이다. 특히 갈라디아서 6장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할례문제와 율법준수를 통한 구원론의 오류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박해왔다. 이를 통해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 곧 오직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핵심을 가르친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갈라디아서 6장의 의미를 깊이 살피면서, 왜 바울이 마지막 장에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물질적인 나눔’을 언급하며 편지를 마무리하는지 그 의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갈라디아 지역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자들이들어와서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 요소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충분치 않게 여기고, 구원을 좀 더 ‘확실하게’ 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전통적 의식인 할례가 필요하다고 떠들어댔다. 이들은 할례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전체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이 온전해진다고까지 확대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야말로 ‘다른 복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복음은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전하며, 구원에 할례나 율법의 어떤 규정도 결코 플러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해져야’ 한다면, 결국 “십자가의 능력이 불충분하다”는 결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1장부터 5장에 걸쳐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 진리를 바울이 논증하고, 5장 후반부에서는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6장에 들어서 바울은 이 성령의 삶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서로 짐을 져주는 것,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 등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적 사랑을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그 사랑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물질을 나누는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6절 이하에서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말씀 사역을 담당하는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맥락을 짚어가며, “사랑의 첫걸음은 용서와 관용이며 다른 이의 짐을 나누어 지는 것이고, 그다음은 구체적으로 재정을 나누고 물질을 도움으로써 그 사랑을 더욱 완전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특히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선행이나 악행이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는다”는 원리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바로 직전 구절에서 ‘가르침을 주는 자를 물질적으로 섬기는 것’이라는 맥락이 이어진다는 점을고려하면, 바울은 여기서 실질적인 ‘물질적인 심음’과 그 열매를 상당 부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심으면 더 큰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식의 기복주의로 흐르는 것은 결코 바울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바울이 ‘재물’을 말할 때에는 항상 두 가지 큰 전제가 깔려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가난한 자를돌보는 것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모습”이라는 점이며, 또 하나는 “우리가 마음껏 베풀어도 결코 결핍에 빠지지 않는 은혜”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이다. 고린도후서 9장에서도 “하나님이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현재 먹을 것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씨앗까지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마음껏 나누라는 권면이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 말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거두게 하심을 믿고 “선을 행하는 일에 지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물질적 나눔까지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를 두고, 교회 안에 혹시라도 “너무 돈 이야기가 빈번하다”라든지 “베푸는 것이 부담스럽다”라든지 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음을 바울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7절 상반부에서“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분명히 환기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물질을 나눌 때, 억지나 인색함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라”는 의미로도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갈라디아서 6장의 마지막 권면은 복음과 성령의 열매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할례당처럼외적인 율법 조항을 지켜야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자들과 달리, 바울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 돕고 나누는 삶”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가 6장 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강조하는 핵심 정신이다. 먼저는 교회 안에서 서로 돌아보며, 가난한 자가 없이 함께 살도록 물질을 나누고, 그 사랑이 교회 바깥의 세상에도 흘러나가게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장재형 목사는 매우 실제적으로 풀어주면서, 갈라디아서 6장을 ‘교회 안팎을 향한 실천적 복음’의 맥락으로 정리한다.

이로써 갈라디아서는 6장 10절까지 사실상 본론이 마무리되고, 11절부터 편지 결론부로 넘어간다. 바울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는데, 이는 대필을 맡긴 로마서나 다른 서신과 달리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직접 썼다는증거 혹은 안질로 인해 큰 글자로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암시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건, 바울은 그만큼 갈라디아 교회에 전할 이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느꼈고, 마지막에도 “여전히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오류를 재차 지적하며 다시는 갈라디아성도들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Ⅱ.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물질적 도움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랑’과 ‘나눔’을 언급하는 방식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사랑의 속성을 설명했다면, 갈라디아서 6장은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구현되어야 하는가”를 예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도시인 중심 선교에 익숙했던 바울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가는구체적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한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은혜로 거듭났지만, 율법주의자들의 교묘한 가르침에 흔들려 ‘다시 율법적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야 하나’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너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은 결국 서로 짐을 지고 실제로 돕는 데까지 이른다. 할례 여부나율법 조항 준수 여부가 아니라, 서로를 물질적으로 돌보고 진정한 공동체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참 복음의 실천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6장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구절은,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코이노니아(koinonia)’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2장이나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재산과 소유를 서로 통용하며, 누구도 궁핍하지 않게 서로 돌보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그 이상을 완벽히 실천했다는 것은 아니며, 바울은 교회마다 이 부분을 계속 권면하고 가르쳐야 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말씀을 전하는 자’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헌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는 척하거나 “설교자나 교사에게 굳이 물질적 보상을 해야 하나?”라는 식의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말씀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교사들, 선교자들, 목회자들을 방치해 두지 말고, 모든 좋은것을 함께 나누어라”라고 교훈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원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 예를 들어 목사나교사, 전도사, 선교사 등이 물질적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결코 공동체적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설령 돈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영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성경은 결코 물질 문제를 피상적 영역이라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물은 중요한 ‘영적 시금석’이자,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바울이고린도후서에서도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기쁨으로 연보하고 선행을실천하라고 권면한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6장 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은, 사랑이 행동으로, 특히 물질로 심어질 때 그 결과가 아름다운 열매가 된다는 영적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원리를 악용하여, “심으면 곧바로 배로 갚아주신다”는 식의 과잉된 번영신학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크다. 바울이 의도한 바는, “선행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원리다. 선행이 반드시 물질적으로만환원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나 공동체의 유익에서나,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풍성하게 거두게 된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기적인 욕망에 휘둘려 살아간다면 결국 썩어질 육체적 결과에 이를 것이지만, 성령 안에서 타인을 위하여 사랑과 선행을 심으면 영원한 가치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대조적 표현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갈라디아서 6장 9~10절의 권면—“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때가 되면 거둔다,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을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선교적 방향성과 윤리적 기초를 짚어준다. 선행을 지속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이타적 헌신과 나눔을 지속하다 보면 번번이 지치거나 실망하게 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돕는 이들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악용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 결국 우리가 행한 선은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kairos) 안에서 꼭 열매를 맺는다”고 격려한다.

이는 교회가 바깥 세상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라고 했는데, 우선순위가 교회 형제들을 먼저 돕는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이에게’라는 단서를 달아 교회 밖에 있는 궁핍한 이들도 돌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가난한 이웃과 약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윤리이며,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갈라디아서 6장 후반부를 보면,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는 바울의고백이 나온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오직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고, 우리의 존재기반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증명하려 했고, 심지어 이를 자신의자랑거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곧 “세상적 기준과 가치관은 더 이상 내게 효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분의 낙인(stigma)이 내 몸에 찍힌 자로 살아간다”는 바울의 다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즉 ‘세상에 대해 죽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구체적으로 묵상해보도록 이끈다.

한편, 6장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라는 말씀은, 외형적 표식이나율법 준수 여부가 아니라 ‘새 피조물(new creation)이냐 아니냐’가 관건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예루살렘회의(사도행전 15장)에서도 이미 결론이 났듯이,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에 ‘할례’ 같은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고, 바울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맞선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6:16)라고 하는 부분 역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포인트는, 갈라디아서가 ‘교리’로 시작했지만 결국 ‘실천’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복음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교리적 선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구현하고, 더 나아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결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은 일종의 “복음의 열매 맺음”을 마지막에 핵심적으로 다룬다.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의 섬김, 어려운 이웃에 대한 봉사, 말씀 사역자에 대한 물질적 돌봄, 이런 모든 실천은 결국“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라는 전언에 대한 구체적 답변이다.

이를 통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재정립하게 되고, 무엇보다 이 편지를 받은 갈라디아 교회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들도 “우리가 과연 진정한 복음을 붙들고 있는가? 혹은 교회 안팎으로 그 복음의 능력을 나누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점검하도록 촉구한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와 멍에를 씌우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데”(갈 5:13) 써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로 용서요 관용이며, 실질적 도움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기쁨이며, 교회가 세상에 보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모든 내용을 담아내는 장재형 목사의 강설은, “거룩한 교리와 가장 현실적인 물질의 영역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는지혜로운 가르침”으로 요약된다. 교리나 신앙고백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실제 삶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해방했을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우리의 재물과 시간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을 “사랑의 행함과 십자가 중심성”으로 맺어가는 것이다.

Ⅲ. 십자가 중심의 복음과 신앙의 완성

갈라디아서 6장의 마지막 구절들, 특히 6장 17~18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라는 고백과 함께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맺는 대목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품은 애정과비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거짓 교사들이 퍼뜨린 헛된 주장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 영적 고통을 겪어온 현실을 토로하는 동시에,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말라”는 강력한 당부다. 바울이직접 전해준 복음이 곧 진리이며, 다른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나 ‘율법적 전통’도 복음에 추가되거나 복음을 대체할 수 없음을최종적으로 선포한다.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Stigma)’이 있다고 말한다. 이 ‘스티그마’라는 말은 노예나 가축에게 찍는 낙인, 혹은 군인이 소속을 표시하는 문신 등을 가리킨다. 이는 곧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가장 적극적이고 분명한 표시다. 실제로 바울은몸에 수많은 매질과 핍박의 흔적을 품고 살았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고, 돌로 맞고, 채찍질당하는 등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 얻은 흉터들은 외적인 폭력의 산물일 뿐 아니라, 동시에 바울이 ‘예수의 종’이며 ‘예수께 속한 자’라는 낙인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바울의 몸에는 복음전도자로 살아온 흔적이 선명하게 배어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바울의 영적 자랑이자 그의 사도권의 증표였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작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은 육체의 모양, 즉 ‘할례’와 같은 외적인 표지로 자랑하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가진 표지, 즉예수의 낙인은 진정한 복음 사역의 산물이고,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천명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입힌‘종교적 표식’을 자랑거리로 삼으려 했지만, 바울에게는 그러한 외적 표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도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으며, 6장 14절에서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라고 고백했다.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바울의 실제적 삶이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결말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자”로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교회를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결론이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달하고자 했던 모든 가르침의 종합이며, 또한오늘날 교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도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스며들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지켜야 한다, 저 의식을 행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복음에다 뭔가를 보탠다. 그러나 복음은 본질적으로 완전하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다. 여기에 다른 무엇을 더하면, 그것은 더 이상 ‘오직 십자가’가아니라 ‘십자가 플러스 무언가’가 되어버리고, 그 순간 복음은 본래의 순수함을 잃고 왜곡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잘못 해석하여, 방종과 책임 회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니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결코 참된 복음의 열매가 아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자발적 헌신과 나눔”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물이 바로 갈라디아서 6장이제시하는 “사랑의 짐 나눔”이며, 말씀을 전하는 자와의 “좋은 것 나눔”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그 십자가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실천이 결합할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장재형목사는 “이 온전함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동시에 갈라디아서가 보여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정리한다. 실로 갈라디아서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신학의 정수와 교회 공동체 윤리의 핵심을 모두 담고 있다. 바울의 절박함과 열정이 곳곳에서 느껴지며, 그가 교회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염려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6:18)라는 마지막 인사는,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진심 어린 축복이자, 편지를 읽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축복의 메시지다.

이 축복은 단순히 인사치레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를 결론짓는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자격이나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이웃에게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는 말씀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율법주의나 행위주의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도 허용되지 않는다. 참된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를 나타내는 열매를삶의 자리에서 맺게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짐을 나누고, 교회를 넘어 세상의 소외된 이웃에게까지도 착한 일을 베풀며, 무엇보다도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태도—이것이 갈라디아서가 요청하는 ‘믿음의 행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우리 시대 교회의 모습과 관련지어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러 교회는 재정 문제에 봉착해 있고, 때로는 헌금문제를 두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헌금을 강조하면 사람들이 부담을 느낀다”고 우려하여 아예물질에 대한 언급을 꺼리기도 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이 보여준 태도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물질 문제를 투명하고 성경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곤궁에 처해 있다면, 공동체가 그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도리요,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풍성한 은혜 안에서 서로를 돕는 것”이라는 관점이 성립되어야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는 길이다.

또한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가 있다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돕고 세워주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가르침을요약한다. 교회 안에서 소외되는 이가 없어야 하며, ‘믿음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가족인 만큼, 그들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쏟고실질적인 도움을 건네라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 밖의 세상에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자들이존재한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서도 나아가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예수님 말씀처럼, “목마른 자에게 물 한 그릇주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자각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6장은 “오직 십자가”라는 교리적 중심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을 강력히요청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죄에서 해방되었다면, 이제 그 은혜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다. 교회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은 이로서 서로를 돌보며, 나아가 세상을섬기는 데에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결코 세상의 칭찬을 얻으려는 목적이나,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자기과시에 빠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그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결국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보여준 메시지는, 율법의 멍에와 사람의 의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은 사랑으로 발휘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할례’를 내세우며 그럴듯한 종교적 의식을 강요하는 세력이 교회 안에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면, 교회는 복음을 왜곡하며 점차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반면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실제로 실천될때,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세상에도 소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에서 갈라디아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임을 분명히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은연중에 ‘율법주의’가 스며들어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반복되어 왔다. 중세교회에서는 면죄부 판매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고,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현대에도“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각종 규정 준수”를 복음보다 더 강조하는 풍조가 없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 6장은 그 어느시대에도 변치 않는 복음의 핵심을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매우 중요한 장(章)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십자가 중심”이요,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사람들이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 18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말하며 끝을 맺는다. 사도 바울은 서신마다 맨 마지막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원하는 축복의 인사를 담았다. 이는 “은혜로 시작된 신앙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혜로 붙들려야 한다”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신학적 선언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복음의 자유’도 결국 이 은혜의 표출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일관되게 붙드는 원동력도 역시 은혜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주신 사랑과 용서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기에, 이제 우리는 영원토록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은혜가 나를 통해 이웃에게, 그리고 세상에 흘러갈 때, 교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빛으로 존재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거듭 강조하며, 복음의 길은 결코 ‘나 혼자만 잘 믿어 천국에 가는’ 개인적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과나눔으로 ‘공동체와 세상’을 섬기는 ‘확장적 구원’의 개념임을 상기시킨다. 갈라디아서 6장의 강조점은 바울이 그토록 사랑했던갈라디아 교회가 이 원리를 실행함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혼돈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동시에 이 말씀은 21세기의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각자의 삶 속에서 “남의 짐을 지고, 배고픈 자와 궁핍한 자를 돌아보며, 복음을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궁극적으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되 지치지 않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한다.

이처럼 갈라디아서가 종결부에 남기는 당부는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기쁨에서 비롯된‘능동적 실천’이다. 그 실천이 성도 개개인을 통해 드러날 때, 교회는 세상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한다. 율법으로 규정된 ‘할례’가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받은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하나님께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하여 가르쳐주신 ‘참된 자유’의 길이자 ‘성령의 열매’가 무르익어가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6장은 복음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는 교회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흔들림 없이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공동체를 세워 나가라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요, 그 증거는 말이나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 사랑의 행위로 나타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복음이 단지 교리적 체계나 신학적 담론을 넘어 “공동체와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재차 선포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6장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삶에서 실천한다면, “내가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바울의 확신과 열정이우리 안에도 살아 움직이리라는 소망을 갖게 된다. 그렇게 교회는 시대를 뛰어넘어 줄기차게 복음의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며, 율법주의나 세속주의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거룩한 공동체로 성장해갈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인사를 곱씹으며,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울의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보화 같은 결론이며, 갈라디아서를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믿음이 구체적인사랑의 행위로 결실할 때, 교회는 참된 자유를 소유한 공동체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선한 도구가 된다. 할례나 무할례가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서 서로를 섬기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예수의 낙인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어 선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이 결론이 곧 갈라디아서 6장의 진수다. 장재형 목사가 그 핵심을 우리 시대에 맞게 풀어내면서,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은혜를 힘입어 이웃을 섬기자”는 권면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맥을 정확히 이어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