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빛 – 장재형목사

1. 빌라도의 심문에 나타난 진리와 권세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실 때의 상황은 복음서 중 요한복음 18장 후반부부터 19장 초반부에 걸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부분,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의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극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이후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의 종교재판을 거쳐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모습을 묘사한다. 특히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 그리고 빌라도가 이를 접수하고 반응하는 태도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동시에 유대인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가진 죄성, 그리고 무리들의 악한 집단 심리가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를 낱낱이 폭로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설 당시 이미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밤샘 신문을 당하셨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다는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쓰신 상태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적 관습 혹은 법으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에(요 18:31)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받아 내려고 그를 끌고 간다. 빌라도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자였으므로, 유대 땅에서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려면 그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음 대면하고 묻는 것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이다(요 18:33). 유대 지도층이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을 자처함으로써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자’라는 식으로 변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이 이 세상의 왕, 곧 현세적 정치 권력으로서의 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로마의 제도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구조 안에서 왕위를 차지하려거나 무력으로 통치권을 잡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빌라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었다. 로마 총독으로서 그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은 반역자, 즉 로마 제국에 해를 끼칠 정치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왕국은 빌라도가 속해 있는 정치 질서나 세속적 권세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곧 진리와 사랑의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이다. 현세의 정치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구원과 영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이자 왕권이 임하는 곳이다. 둘째,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에만 사로잡혀 예수님을 반역자로 규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예수님께서 미리 차단하셨다는 점이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만일 예수라는 사람이 실제로 정치적 반역을 꿈꾸는 인물이라면, 그의 제자들이 로마 군사들과 맞서 싸웠을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설명에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이는 로마에 반역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이중의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폭력을 통해 유지되거나 확장되는 세상 왕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나마 빌라도가 우려할 만한 정치적 반역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셈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발언에 대해 빌라도는 다시금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라고 묻는다. 이는 “정말로 너는 왕적 권세를 가진 자라고 스스로 확신하느냐?”라는 질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말하는 ‘다른 세계의 왕국’이 정확히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 안에서 어떤 정치범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권위와 진리가 드러남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요점이 분명하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자신이 곧 진리임을 선포하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진리에 대한 증거”임을 다시 못 박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진리에 속한 자”라는 표현으로 제시하셨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영적 원리를 담고 있다. 즉,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아무리 종교적 직위가 높다 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세를 가졌다 하더라도 진리를 모르면 예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진실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음이 열리고, 겸손히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라면 로마의 총독이나 갈릴리 변두리에 사는 사람이나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을 ‘왕이신 분의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발언에 대해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라고 되묻고, 더 이상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이 요한복음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가 이미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 혹은 진리를 들을 여유가 없는 정치가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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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빌라도는 유대인 무리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요 18:38)라고 두 차례나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을 직접 들으면서, ‘이 사람은 정치적 반역자가 아니라 뭔가 존엄하고 순결해 보인다’라는 인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공언한 사실 자체가 곧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과 무리는 집요하게 예수님의 처형을 요구했고, 예수님 대신 극악무도한 죄인 바라바를 풀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요 18:40). 바라바는 강도요 민란의 선동자요 살인자였다(막 15:7; 눅23:19; 행 3:14). 로마 입장에서는 명백한 사형 대상이었을 정도의 흉악범이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압박함으로써, 예수님을 죽이는 방향으로 재판이 흐르도록 집단적 선동을 지속했다.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무죄로 풀어주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중의 압박과 정치적 사정, 그리고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요 19:12)라는 위협에 흔들리고 만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기 전, 채찍질이라도 심하게 해서 무리의 분노를 달래려는 시도를 한다(요 19:1). 그러고는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도록 하여 조롱당하게 만들었다(요 19:2–3). 빌라도가 이를 통해 백성들의 분이 풀리고 예수님을 살려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무리는 더욱 크게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빌라도의 심문은 세상 권세자의 눈에도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드러내는 과정이 되었으나, 동시에 그 무죄하신 주님이 결국 인간의 악의와 종교적 위선, 정치적 타협 속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는 역설을 보여 준다. 빌라도 자신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며 세 번이나 선언했지만(요 18:38, 19:4, 19:6 참조), 결국 십자가 형을 선고한다. 요한은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으며, 동시에 이 죽음이 단순한 억울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 기록된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첫째로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로마 총독조차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게 되는 극적 대치를 통해, 예수님의 결백이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둘째로, 예수님은 정치적 반역자나 세상적인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셋째로, 진리가 오히려 거짓된 종교권력과 정치적 야합에 의해 배척당하는 역설이 드러난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봉하며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으나, 정작 그 메시아가 오시자 스스로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처럼 이 장면은 ‘진리가 나타날 때 오히려 거짓과 위선이 폭로되고 심판을 받는다’는 진리를 단적으로 시각화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자세를 깊이 묵상해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예수님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왔다”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권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진리의 왕권”이라는 개념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는 세상 권력과 충돌하거나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거짓에 물든 인류에게‘생명을 주시는 통치자’로 오신 예수님의 위치를 인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결국 세상 권세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들, 즉 참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보여 주신 모습,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나 세상 속에 임하여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빌라도의 심문 장면은 예수님의 무죄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아들이시며 십자가에 이르시는 구속의 길을 걷게 되시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을 묵상할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 곧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현세적 권세자나 종교적 기득권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듯, 오늘날도 진리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참된 복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심지어 배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 진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방식이야말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이었다. 따라서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장엄하고도 온유한 모습은, 훗날 부활을 통해 입증될 승리의 싹이 숨겨져 있었던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심문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세상 권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여 준다. 세상의 왕권은 주로 폭력이나 위압, 정치적 책략, 군사력, 경제력으로 이룩되고 유지된다. 예수님 시대의 로마제국이 대표적이다. 반면 예수님이 보여 주신‘하나님의 나라’는 겉으로는 아무 힘이 없어 보이고, 십자가처럼 치욕적인 처형 도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능력이 선포되고 참 자유가 주어진다. 이 점이 바로 요한이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예수님의 ‘진리의 왕권’이다.

2.세상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긴장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는 말씀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해석과 적용을 낳았다. 어떤 시기에는 이 구절이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완전히 분리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세상의 정치·경제·문화 영역을 변혁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며,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정치적 관심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틀에 제한되지 않는 차원의 통치자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목적과 방법은 세상이 이해하거나 흉내 낼 수 없는 진리에 기반한다. 세상 권세자들은 이 진리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이익과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속한 자들만이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단언하심으로써, 이 진리가 사람들의 표면적 지위나 능력과 무관함을 밝혀 주셨다.

이 진리와 세상 권세의 긴장은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종교권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셨고, 결국 빌라도라는 세속 권력자의 재판정을 거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는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세 번이나 고백했다. 이는 곧 세상 권세조차 예수님의 무죄함과 순결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정치적 책략이나 무력 동원으로 자신을 보호하거나 빌라도에 맞서지 않으셨으며, 침묵 가운데 채찍질과 모욕을 감내하셨다. 이러한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왕권이 세상 권위자들이 추구하는 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 극명하게 부각된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무리는 왜 그렇게까지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까? 성전 체계를 뒤흔들고, 그들의 종교적 위선과 권위주의적 행태를 폭로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가르치는 이들의 위선을 낱낱이 드러내셨다. 이로 인해 종교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빌라도에게“예수는 로마에 반역하는 자”라고 모함하며,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집단적 압박을 가했다. 이는 겉으로 종교의 열심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메시아를 배척하는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빌라도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정작 자신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대면하고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인간의 악을 넘어서는 구원의 계획을 품고 십자가에 이르신다.

이 장면을 두고 많은 신학자들이, 빌라도의 궁극적 책임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책임은 각각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를 논의해 왔다. 누가 정말 예수님을 죽였나?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종교적·정치적 음모나 법정 재판의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 죄악 전체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된 구속 사역이라고 증언한다. 예수님께서 정말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죗값을 지고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구속 역사를 이루는 데에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죄책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 두려움 등으로 인해 정말로 ‘무죄하신 이’를 죽인 죄를 범했다. 동시에 이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지닌 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곧 누구라도 자신이 지닌 악함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참한 셈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빌라도와 예수님, 그리고 유대인 무리 사이에서 벌어진 이 논쟁과 심문의 과정을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의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님은 지금도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문제는 교회가 혹은 성도들이 진리에 속하느냐, 아니면 세상 권세와 야합하며 진리를 외면하느냐이다. 과거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배척했던 모습은, 현대 교회 안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곧 인간적 명예나 재산, 교권, 혹은 사회적 지위 등을 잃지 않으려고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면서도 겉으로만 종교적 열심을 표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매우 경계하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진리의 권세는 세상을 전복시키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죄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구원하는 것”임을 수차례 강조한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군중의 선택 또한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들은 때때로 폭력을 휘두르고 현실의 정치나 사회체제를 뒤집으려는 극단적 인물을 통해, 자신들의 울분을 해소하고 욕망을 투영하기도 한다. 바라바 같은 민란의 선동자는 때로 군중에게 통쾌함을 줄 수도 있으며, “이제 로마를 뒤엎고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체제를 세워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폭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 주님이 왕으로 오신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가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나라다.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볼 때에는 실패한 왕처럼 보이고, 무력한 희생자처럼 보이지만, 부활 후에는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자들은 세상의 가치나 방법론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함을 암시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이를 반복해서 설교하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한 영적 싸움이다”(엡 6:12)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눈에 보이는 정치적 대결이나 세력 다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사랑을 실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또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은둔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곳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하셨다. 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의미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요 20:21)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의 빛을 비추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 자기들만의 영역을 만든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고 하며, 거룩함과 구별됨을 유지하되, 동시에 세상으로 파송받아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증거해야 함을 역설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리를 바로 분별하고 붙드는 일이 아무리 교회나 성도에게 당연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열심을 갖고 있었고, “메시아를 대망한다”고 공언했지만,막상 참된 메시아가 오셨을 때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적대하고 거짓으로 모함하며 죽이려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진리가 그들이 누리던 종교적 기득권과 위선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형식적 종교생활에 안주하거나, 세속적 이익과 결탁하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참된 진리를 실천하기보다는 자기 편한 길을 추구하면, 결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결국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면서도, 눈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언제나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우리는 과연 어느 왕에게 속해 있는가’를 묻는다. 세상의 영향력과 명예, 물질, 혹은 편리함을 좇아서 진리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왕으로 사역하시는 방식’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사랑과 순종을 진리의 핵심으로 붙잡고 있는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나라는 무력과 획책이 아닌, 자발적 희생과 봉사,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확장된다. 그것이 제국의 힘이나 군중심리에 의존해 반역을 꿈꾸던 바라바와의 결정적 차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혹은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리와 사랑을 지키는 자세를 의미한다. 동시에 세상 권세자들이 “너희가 말하는 나라는 무엇이냐?”, “너희가 말하는 왕은 누구냐?”라고 물을 때, 예수님처럼 담대하고 명확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 속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권자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길이다. 그리고 이 고백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겸손과 온유, 사랑과 희생이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신뢰를 얻게 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거짓된 심판을 스스로 지고 감당하셨던 대속적 성격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도 무죄로 선포되었고,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길을 열어 주셨다. 만약 예수님께 죄가 있었다면, 십자가가 대속의 사건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죄도 찾지 못한’ 주님이 죽으심으로, 무고한 희생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 이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이며,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세상 권세의 심판대에 선 예수님은 사실 우리가 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대신 서 주신 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을 누리는 동시에, 그 사랑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왕권’과 ‘세상 권세’의 충돌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까? 대개는 아주 큰 정치적 박해나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직장이나 학교, 일상 속에서 진리에 반하는 유혹이나 타협의 압력이 늘 도사린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을 동원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또한 때때로 억울한 비난을 받더라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과 온유의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 이것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는 왕이 아니다, 진리가 없다’고 외치는 소리 앞에서, 예수님의 진리를 붙드는 자로 살려면 고난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과 영생, 곧 하나님 나라의 영화에 동참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도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재현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화려한 예배나 프로그램, 교세 확장에 몰두하면서 정작 진리와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무리가 될 수도 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마 7:21), 실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다름없는 행태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자신이 가진 정치적 계산 때문에 진리가 누군지, 혹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예수님을 릴리스하려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군중의 압박에 굴복해 무죄한 이를 사형에 내몬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외적으로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드러내신 참된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거부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상 권세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불의와 진리에 대한 배척, 그리고 종교적 위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한편, 예수님이 그 속에서 어떻게 참된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시는지를 알려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빌라도의 질문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 그리고 “너는 과연 어느 왕에게 속해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나는 진리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백이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야 하며,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또 우리가 몸담은 사회 속에서도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심문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죄함과 진리의 왕권을 발견한다.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과 빌라도가 거짓과 두려움, 이기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모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의 성취라는 사실을 목격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이로써 참된 권세가 무엇인지, 참된 왕이 누구신지가 드러난다. 이 왕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빌라도가 알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되며, 죄와 사망을 이기는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본문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정체성을 상기시키며, 진리를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언급하듯,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서도 진정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하고 있다. 교회 역시 때로는 세상 권세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옛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 권세 앞에서 담대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확고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빌라도의 심문 장면은 바로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심을 스스로 증언하신 사건이요, 빌라도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거나 알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폭로한 사건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완성하는 통로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를 알며 자유케 되는 길을 얻었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장재형목사가 거듭 권면하듯 진리이신 예수님을 삶의 왕으로 모시는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왕이신 주님을 따라, 겸손히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함으로써, 세상도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받은 강력한 메시지이자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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