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강해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는 부활을 향한 신앙이 가장 뜨겁게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주께서 다시 사셨다”는 강렬한 고백이 지나간 뒤에 찾아온다고 한다. 기적 같은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일상은 여전히 반복되고, 뜨거웠던 예배의 여운 뒤에 마주하는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1장은 바로 이러한 신앙적 공백기에 던져진 중대한 서사다. 흔히 이 대목을 본문의 끝에 붙은 부록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사실 이곳은 부활이라는 결론이 어떻게 성도의 삶으로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신학적 마침표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을 선포했다면, 마지막 21장은 그 생명을 얻은 자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그리고 한때 실패했던 제자가 어떻게 다시금 사명의 길로 복귀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가 이 장을 ‘전도와 목양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끊임없이 조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활은 머리로 동의하는 정답이 아니라 공동체를 움직이는 실재적인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는 구체적인 헌신과 책임감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디베랴 호숫가의 새벽 풍경은 방향을 잃은 제자들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일곱 제자가 밤을 지새우며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온 장면은 단순한 조업의 실패가 아니라, 주님의 부재 앞에서 무기력하게 과거의 익숙한 삶으로 회귀해버린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상실감에 빠진 이가 붙잡을 수 있는 최후의 질서였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부활의 소식 직후에 나타난 이 정체와 지연의 시간은 매우 인간적이기에 오히려 성경의 진실성을 뒷받침한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은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고단함과 공허함이 교차하는 새벽 노동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오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을 던지신다. 이는 제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와 결핍을 입술로 고백하게 만듦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주님의 명령은 명쾌했다.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인간의 관성과 확신을 꺾고 주의 뜻에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방향성’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평생 호수에서 뼈가 굵은 어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버리고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던지는 행위는 단순한 시도가 아닌 전적인 순종이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153마리의 물고기는 순종이 빚어내는 풍성한 새 세계의 증거다. 이 구체적인 숫자는 이 사건이 신화적인 환상이 아닌 실제적인 기억임을 방증하며, 동시에 모든 민족을 품는 교회의 사명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여기서 요한은 수많은 수확 앞에서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하며, 복음의 그물이 지닌 견고함을 강조한다. 공동체가 성장하고 확장될 때 겪는 분열과 와해의 두려움에 대해, 주님은 말씀의 충분성이 교회를 지탱하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신다. 교회의 역량은 인적 조직의 치밀함이 아니라 오직 찢어지지 않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물고기 상징인 ‘익투스’를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던 전통 역시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다. 박해의 위협 속에서 그들은 물고기 형상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우리는 구주 예수의 이름으로 산다”는 결의를 다졌다. 153이라는 숫자를 두고 어거스틴은 율법과 성령의 은혜가 결합된 완전한 구원의 수로 해석하는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건은 라파엘로의 명화 ‘기적의 고기잡이’를 통해 시각화되어 우리에게 더 깊은 경외를 선사한다. 거친 파도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제자들이 마주한 신비는 일상과 성스러움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해낸다. 주님은 이처럼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의 표면 위로 다가오시어, 구체적인 순종의 실천을 통해 실패의 기록을 승리의 선교 서사로 다시 쓰게 하신다.

하지만 요한복음 21장의 진정한 백미는 결과물로서의 물고기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미리 숯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하신 주님의 ‘선행적 은혜’에 있다.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련되어 있던 식탁은 신앙의 주도권이 인간의 성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있음을 증명한다. 장재형 목사가 전도와 목양을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로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전도가 주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식탁으로 이웃을 초대하는 행위라면, 목양은 그 식탁에 앉은 이들이 은혜의 온기 속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 사랑의 돌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역의 기초는 인간의 기획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베풀어 놓으신 은혜의 거처를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식사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실패한 영혼을 향한 완전한 회복의 리듬을 보여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의 과거 부인을 들추는 정죄가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랑을 치유하여 사명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사랑은 감정적 고백을 넘어 “내 양을 먹이라”는 실천적 책임으로 구체화된다. 사랑의 진정성은 결국 연약한 영혼을 돌보는 수고를 통해 검증된다는 것이다. 밖으로는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전도의 사명에 충실하고, 안으로는 양 떼를 세심히 살피는 목양의 책임에 매진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온전한 균형을 이룬다. 베드로의 조심스럽고 겸손한 대답 위에 사명이 얹혀졌듯, 사역의 길은 완벽한 자가 아닌 주님의 용서를 힘입어 다시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길이다.

나아가 주님은 타인의 운명이나 마지막 때의 시기에 집착하기보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확한 명령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불필요한 사변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돌보는 현재의 책임에 충실하라는 영적 권고다. 참된 종말론적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신뢰하며 오늘 더 정직하게 복음을 전하고 더 성실하게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신앙의 유산은 다음 세대에게 견고한 성경적 세계관으로 전수되어야 한다. 개인의 감정과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거대한 서사 안에서 자신의 삶을 해석할 수 있을 때, 청년들과 다음 세대들은 포스트모던의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요한복음 21장은 부활을 목격한 교회가 지향해야 할 실천적 지도를 그려준다. 교회는 실패한 이들의 모임이지만 결코 실패에 주저앉지 않으며, 회복의 은혜를 입어 다시 세상으로 파송되는 곳이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성과를 내는 조직이 아니라 주님이 차려주신 은혜의 식탁 위에서 성찬적 감사를 누리는 사명자들의 모임이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우리에게 던지는 최종적인 질문은 명료하다. 우리는 누구의 음성을 따라 그물을 던지고 있으며, 우리의 사랑은 구체적인 목양의 자리에서 어떻게 증명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답은 복잡하지 않다. 주의 말씀대로 방향을 꺾고, 맡겨진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복음의 그물은 여전히 찢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며 주님의 은혜는 충분하기에, 교회는 다시금 확신을 가지고 오른편을 향해 그물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요한복음 21장을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의 생생한 실천서로 만드는 길이다.

blogflare

davidjang.org

고린도전서 16장 해설 – 장재형목사

장다윗(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의 설교가 지니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단순한 지식의 집합으로 소비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체온과 공동체의 호흡을 현재의 교회 안으로 되살린다는 데 있다.

그의 고린도전서 16장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흔히 “마지막 장”이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 왔던 본문이 사실은 교회의 정체성과 실천을 가늠하는 핵심 장면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방언과 예언의 질서, 부활이라는 거대한 신앙 고백을 지나, 재정 후원과 이동 계획, 사람들의 이름과 인사로 마무리되는 서신의 결말은 결코 우연적 배치가 아니다. 이는 복음이 추상적 개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일정, 신뢰와 물질, 존중과 눈물이 얽힌 현실의 언어로 구현되어야 함을 선포하는 선언에 가깝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고린도전서 16장을 ‘신앙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현장’으로 읽도록 이끈다. 교리가 분명하다면 반드시 책임 있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고, 실천이 살아 있다면 진리의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통합적 원리가 이 마지막 장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의 서두를 여는 주제는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다. 여기서 연보는 즉흥적인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조직된 사랑의 리듬을 뜻한다. 바울이 요청한 것은 일회성 헌금이 아니라 지속적 책임이었다. 헬라어 표현이 암시하듯, 이는 충동적 시혜가 아니라 계획된 모금이며 공동체적 참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들과 동일한 원칙 아래, 매주 첫날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미리 준비하도록 안내한다. 이 지침에는 섬세한 목회적 통찰이 담겨 있다. 첫째, 갑작스러운 부담을 제거한다. 바울이 도착한 후 분위기에 휩쓸려 모금하는 방식은 감정을 소진시키고 공동체를 불필요한 압박에 빠뜨릴 수 있다. 둘째, 선한 습관을 형성한다.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반복된 훈련을 통해 성품으로 자리 잡는다. 셋째, 형편에 따른 참여라는 공정성이 있다. 동일한 액수를 강요하지 않되, 모두가 참여함으로써 한 몸의 책임을 나누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교회의 재정이 단순한 운영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를 성숙하게 하는 실천 신학의 장이라고 강조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은 신약 전반에 흩어진 기록을 통해 실제적 상황이었음이 확인된다. 초대교회는 이상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기근과 가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던 현실의 공동체였다. 그렇기에 바울이 놓은 연대의 다리는 더욱 의미가 선명해진다.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을 돕는 행위는 도덕적 우월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교회가 서로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는 행위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영적 빚’은 죄책이 아니라 감사로 표현되는 연대의 윤리다. 장재형목사의 해설은 이 연대를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추상적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눈물이 고린도의 지갑을 흔들고, 고린도의 풍요가 예루살렘의 생명을 잇는 끈이 된다. 교회는 이렇게 서로의 결핍을 통해 서로를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이 본문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하면, 연보는 단순히 구제 헌금 항목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교회가 물질을 어떻게 다루는지, 곧 청지기 정신과 투명성, 사랑의 동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바울의 연보 처리 방식은 매우 신중하다. 그는 헌금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공동체가 인정한 이들을 세워 편지와 함께 파송한다. 필요하다면 자신도 동행할 수 있음을 말하지만, 그 역시 공동체적 절차 안에 둔다. 이는 재정이 영적 권위라는 명목으로 사유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강력한 장치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현대 교회가 재정을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하며, 어떤 방식으로 신뢰를 쌓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헌금의 액수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랑과 진실의 질서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재정은 교회의 혈류와 같다. 흐름이 막히면 공동체 전체가 병들 수 있다. 유다의 비극이 상징하듯, 돈은 숫자를 넘어 인격을 드러내는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의 조심스러운 절차는 재정을 선교의 연료이자 거룩의 훈련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개념은 정통, 곧 오소독스의 감각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정통은 박물관에 전시된 교리가 아니라 삶을 살리는 진리의 좌표다. 교리가 분명할수록 사랑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반대로 사랑의 실천이 사라지면 교리는 공허한 문장으로 굳어진다. 고린도전서 16장은 이 두 축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현실적인 신학 텍스트다. 바울은 부활을 선포한 직후 연보를 말한다. 이는 부활 신앙이 내세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사랑을 실행할 이유임을 드러낸다. 부활은 미래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윤리다. 장재형목사는 이 연결을 통해 교회가 신학적 깊이를 추구하는 만큼 사회적 책임과 구체적 돌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후 바울은 연보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선교 여정을 공유한다.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향하려는 계획, 겨울을 보낼 가능성,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 그리고 “큰 문이 열렸으나 대적도 많다”는 고백은 사역이 낭만이 아니라 현실의 전투임을 보여 준다. 선교는 영감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머물 때와 떠날 때, 열리는 때와 닫히는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계획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의 표현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 운영의 균형 감각을 읽어 낸다. 열정만 남으면 쉽게 소진되고, 구조만 남으면 생명력이 사라진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신뢰하면서도 구체적인 일정과 가능성을 명확히 한다. 이는 오늘의 교회가 영적인 언어로 현실을 덮어 버리는 태도를 경계하게 만든다.

고린도전서 16장에는 유난히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디모데, 아볼로, 스데바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편지의 끝을 채운다. 이는 교회가 제도 이전에 관계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가 두려움 없이 사역하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세대 교체가 늘 긴장과 오해를 동반한다는 현실을 전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교회가 다음 세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한 사람의 사명이 공동체의 언어와 태도에 의해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묻는다. 존중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사역 생태계를 지탱하는 영적 기반이다. 또한 아볼로에 대한 언급은 특정 인물 의존의 위험을 성찰하게 한다. 교회가 원한다고 해서 사역자가 항상 즉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스데바나의 집에 대한 언급은 가정교회의 생생한 흔적을 보여 준다. 예배당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 한 가정의 헌신은 곧 교회의 공간이자 환대의 문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기기로 결단했다고 말하며, 그런 이들에게 순복하고 존중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섬김이 단순한 봉사를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영적 직분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오늘의 가정과 일상으로 확장한다. 교회는 주일 예배당 안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식탁과 거실, 직장과 거리에서 관계의 방식으로 구현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된다.

편지의 마지막 권면은 간결하면서도 단단하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강건하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요청이다. 강건함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강건함이 사랑을 잃으면 폭력이 되고, 사랑이 강건함을 잃으면 감상으로 흐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교회의 윤리적 나침반으로 제시한다. 깨어 있음은 내적 경건을 넘어 현실의 문제 앞에서 책임 있게 대응하는 태도다. 사랑으로 행하라는 명령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과 배분, 의사결정의 동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은 교회의 운영 지침처럼 보이면서도, 그 깊은 층위에서는 교회의 영혼을 다루는 본문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이 장에서 길어 올리는 핵심은 분명하다. 교회는 사랑을 말로 증명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랑을 실행하고 지속함으로써 복음이 현실에서 작동함을 보여 준다. 연보는 공동체적 책임으로, 재정의 투명성은 신뢰의 구조로, 사람에 대한 존중은 미래를 살리는 배려로 나타난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명령은 신앙을 삶의 문법으로 번역하는 열쇠다. 그리고 마라나타의 소망은 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늦추지 않도록 붙드는 마지막 긴장이다. 이 본문은 오늘의 교회가 어디서 무너지고, 어디서 다시 세워져야 하는지를 묻는 깊은 영적 점검표가 된다. 사랑이 살아 있는 교회만이 진리를 진리답게 지키고, 사람을 사람답게 존중하며, 세상을 향해 복음을 복음답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플로어

davidjang.org

장재형목사, 사도 바울에게 배우는 제자도와 리더십의 정수

참된 교회의 지도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언제나 똑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직함이나 카리스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길, 곧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길이다. 복음은 영웅담보다도 이름 없이 헌신한 제자들의 땀과 눈물을 타고 시대를 건너왔다. 그래서 리더십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이며, 리더를 세운다는 말은 곧 주님의 제자를 빚어 간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누가복음 9장은 제자도의 심장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한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대답은 가난 예찬이 아니라 소유에 묶이지 않는 자유의 선언이다. 내일의 안전망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자유, 가진 것에 붙잡히지 않고 부르심에 붙잡히는 자유가 제자의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장례와 같은 가장 중대한 도리 앞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부르심이 도리의 순서를 새로 정렬한다. 무엇이 더 급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영원한가를 기준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결단, 그것이 제자도를 오늘의 시간표로 번역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은 각오가 아니라 방향을 묻는다. 과거의 미련이나 인간적인 정에 발목 잡히지 않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곧게 밭고랑을 내리듯 한 길을 오래 걷는 일, 그 꾸준함이 제자의 체력이다.

이 정신은 마태복음 10장에서 구체적인 길잡이를 얻는다. 여벌 옷과 지팡이조차 의지하지 말라는 파송의 지침은 무모함을 강요하려는 말이 아니다. “일꾼이 그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약속에 뿌리내린 현실적인 영성, 곧 하나님이 준비하신 공급을 신뢰하는 훈련이자 동시에 교회가 사역자의 필요를 정당하게 돌보아야 한다는 원리다. 장재형목사는 이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현장의 일꾼은 계산된 안전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우고, 공동체는 그 신실하심의 통로로 부름 받았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이 보여준 장면은 제자도의 성숙을 증명한다. 고린도에서 아굴라·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을 만들며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던 그는, 마게도냐 교회의 선교 헌금이 도착하자 곧장 생업을 멈추고 말씀 사역에 전념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자비량의 본뜻은 사역비를 영구히 거부하는 금욕이 아니라, 복음의 진전을 위해 형편을 분별하고 유연하게 적용하는 지혜다. 전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후방에서 재정과 기도로 받쳐 주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충성할 때, 복음은 더 멀리 더 맑게 흐른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전방·후방 선교의 협력은 바로 이 성경적 결을 오늘의 구조와 문화 속에 다시 짜 넣으려는 노력이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헌신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이 흐름을 따라 고린도전서 9장은 제자도와 리더십의 결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사역자의 정당한 권리를 분명히 인정한다. 복음으로부터 생계를 얻을 권리, 가정을 꾸릴 권리, 손수 일하지 않을 권리, 군인·농부·목자의 비유와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율법의 원리를 통해 사역자가 복음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다고 논증한다. 그러나 그는 즉시 다른 길을 택한다.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참된 리더는 권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권리를 아는 만큼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는 체면을 위한 금욕이 아니라, 복음의 문턱을 낮추고 연약한 자들의 양심을 지키려는 사랑의 실천이다. 혹여 누군가 그를 돈 때문에 일한다고 오해할 가능성,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값비싼 소식처럼 보일 위험을 원천 차단하려고, 바울은 자비량의 수고를 기꺼이 떠맡았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못 박는다. “나는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내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 그에게 복음 전파는 선택이 아니라 부득불 해야 할 명령이었고, 상급은 외적 보상이 아니라 “값없이 전함” 그 자체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제자도의 척도를 제안한다. 무엇을 더 소유하느냐보다 무엇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느냐가 리더십의 깊이를 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비량을 모든 사역자에게 획일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때로는 일했고 때로는 전념했던 것처럼, 제자도는 현실을 무시하는 낭만이 아니다. 교회의 충분한 후원이 사역의 집중도를 높이는 시기가 있고, 자비량이 복음의 신뢰성을 증언하는 시기가 있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이 선택이 복음의 전진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연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가, 공동체의 질서와 재정을 무너뜨리지 않는가. 이 질문에 따라 재정은 투명하고 단순해야 하며, 목적 지정 헌금과 일반 헌금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보고는 신뢰를 낳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일꾼이 그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리를 절차로 번역해 사역자 지원을 은혜의 시혜나 눈치 보기의 대상이 아니라 합당한 질서로 정착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전임 사역과 자비량 사역은 우열이 아니라 형태의 차이이며, 교회는 각각이 복음에 더 유익하도록 코칭하고, 전환이 필요할 때 지혜롭게 돕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제자도의 언어를 일상의 문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무소유의 자유는 수입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소유에 묶이지 않는 마음의 훈련이다. 내가 없으면 불안한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명 수행을 가로막는지, 그 대상들에 대해 실제로 하나님께 신뢰의 행동을 했는지 점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우선순위의 재편은 시간 관리에서 드러난다. 달력은 신앙고백의 거울이기에, 말씀과 기도, 제자 양육과 현장 전도의 시간을 사무처럼 배정하고, 성과를 숫자보다 사람의 변화로 기록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뒤돌아보지 않는 헌신은 관계에서 증명된다. 리더의 말은 약속이 되고, 약속은 곧 길이 된다. 힘들다고 관계를 쉽게 갈아치우지 않고 오래 참고 다시 시작하는 끈기가 공동체에 안전을 준다. 자비량의 영성은 직업과 소명의 통합에서 가장 빛난다. 직장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파송지이고, 전문성은 복음을 위한 언어다. 바울에게 장막은 복음의 가림막이 아니라 복음의 다리였듯, 오늘의 전문가·자영업자·학생·창업자는 각자의 현장에서 성실과 탁월함으로 복음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제자도에 대한 경계도 필요하다. 정보의 과잉은 결단의 결핍을 낳는다. 많은 콘텐츠를 소비해도 한 가지를 오래 순종하지 않으면 영적 근육은 자라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뒤돌아보지 않는 헌신”을 온라인 습관에도 적용하라고 권면한다. 말씀을 스크롤로 흘려보내지 말고 삶의 규칙으로 새겨 넣으라. 공동체는 빠른 캠페인보다 느린 동행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프로젝트로 다루지 말고 사랑으로 낳아 말씀으로 키워야 한다. 리더는 말의 밀도가 아니라 삶의 일관성으로 신뢰를 얻는다. 약속한 작은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결국 큰일도 맡을 수 있다.

결국 핵심은 권리의 신중한 사용이다. 권리를 모르는 순진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권리를 남용하는 미성숙은 공동체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권리를 복음의 기준으로 절제하는 성숙은 교회를 세운다. 바울은 합법의 선에서 멈추지 않고 복음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갔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내게 합법한가를 넘어, 형제에게 유익한가, 복음에 아름다운가. 리더는 합법에서 아름다움으로 이동하는 사람이며, 그 이동의 에너지는 사랑이다. 그래서 참된 지도자는 제자다. 세상의 기준을 뒤집는 자유로, 영원의 가치를 현재에 우선하는 지혜로, 뒤돌아보지 않는 충성으로, 그리고 복음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권리를 제한하는 사랑으로 자신을 세운다. 그런 리더를 통해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낳고, 교회는 권력으로가 아니라 생명으로 승계된다. 누가복음 9장의 자유, 마태복음 10장의 신뢰, 사도행전 18장의 자비량, 고린도전서 9장의 권리 포기는 한 줄기 강물처럼 합류하여 오늘 우리의 교회로 흘러든다. 우리가 이 부르심에 응답해 각자의 자리에서 전방이든 후방이든 충성으로 설 때, 복음은 값없이, 그러나 결코 싸구려가 아닌 존귀함으로 다시 빛날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자체가 우리의 상급이 될 것이다.

http://www.davdijang.org

진리의 빛 – 장재형목사

1. 빌라도의 심문에 나타난 진리와 권세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실 때의 상황은 복음서 중 요한복음 18장 후반부부터 19장 초반부에 걸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부분,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의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극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이후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의 종교재판을 거쳐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모습을 묘사한다. 특히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 그리고 빌라도가 이를 접수하고 반응하는 태도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동시에 유대인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가진 죄성, 그리고 무리들의 악한 집단 심리가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를 낱낱이 폭로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설 당시 이미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밤샘 신문을 당하셨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다는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쓰신 상태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적 관습 혹은 법으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에(요 18:31)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받아 내려고 그를 끌고 간다. 빌라도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자였으므로, 유대 땅에서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려면 그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음 대면하고 묻는 것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이다(요 18:33). 유대 지도층이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을 자처함으로써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자’라는 식으로 변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이 이 세상의 왕, 곧 현세적 정치 권력으로서의 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로마의 제도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구조 안에서 왕위를 차지하려거나 무력으로 통치권을 잡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빌라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었다. 로마 총독으로서 그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은 반역자, 즉 로마 제국에 해를 끼칠 정치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왕국은 빌라도가 속해 있는 정치 질서나 세속적 권세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곧 진리와 사랑의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이다. 현세의 정치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구원과 영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이자 왕권이 임하는 곳이다. 둘째,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에만 사로잡혀 예수님을 반역자로 규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예수님께서 미리 차단하셨다는 점이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만일 예수라는 사람이 실제로 정치적 반역을 꿈꾸는 인물이라면, 그의 제자들이 로마 군사들과 맞서 싸웠을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설명에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이는 로마에 반역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이중의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폭력을 통해 유지되거나 확장되는 세상 왕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나마 빌라도가 우려할 만한 정치적 반역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셈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발언에 대해 빌라도는 다시금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라고 묻는다. 이는 “정말로 너는 왕적 권세를 가진 자라고 스스로 확신하느냐?”라는 질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말하는 ‘다른 세계의 왕국’이 정확히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 안에서 어떤 정치범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권위와 진리가 드러남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요점이 분명하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자신이 곧 진리임을 선포하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진리에 대한 증거”임을 다시 못 박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진리에 속한 자”라는 표현으로 제시하셨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영적 원리를 담고 있다. 즉,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아무리 종교적 직위가 높다 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세를 가졌다 하더라도 진리를 모르면 예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진실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음이 열리고, 겸손히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라면 로마의 총독이나 갈릴리 변두리에 사는 사람이나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을 ‘왕이신 분의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발언에 대해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라고 되묻고, 더 이상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이 요한복음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가 이미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 혹은 진리를 들을 여유가 없는 정치가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2fuLEttN1gs

이후 빌라도는 유대인 무리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요 18:38)라고 두 차례나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을 직접 들으면서, ‘이 사람은 정치적 반역자가 아니라 뭔가 존엄하고 순결해 보인다’라는 인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공언한 사실 자체가 곧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과 무리는 집요하게 예수님의 처형을 요구했고, 예수님 대신 극악무도한 죄인 바라바를 풀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요 18:40). 바라바는 강도요 민란의 선동자요 살인자였다(막 15:7; 눅23:19; 행 3:14). 로마 입장에서는 명백한 사형 대상이었을 정도의 흉악범이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압박함으로써, 예수님을 죽이는 방향으로 재판이 흐르도록 집단적 선동을 지속했다.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무죄로 풀어주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중의 압박과 정치적 사정, 그리고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요 19:12)라는 위협에 흔들리고 만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기 전, 채찍질이라도 심하게 해서 무리의 분노를 달래려는 시도를 한다(요 19:1). 그러고는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도록 하여 조롱당하게 만들었다(요 19:2–3). 빌라도가 이를 통해 백성들의 분이 풀리고 예수님을 살려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무리는 더욱 크게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빌라도의 심문은 세상 권세자의 눈에도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드러내는 과정이 되었으나, 동시에 그 무죄하신 주님이 결국 인간의 악의와 종교적 위선, 정치적 타협 속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는 역설을 보여 준다. 빌라도 자신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며 세 번이나 선언했지만(요 18:38, 19:4, 19:6 참조), 결국 십자가 형을 선고한다. 요한은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으며, 동시에 이 죽음이 단순한 억울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 기록된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첫째로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로마 총독조차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게 되는 극적 대치를 통해, 예수님의 결백이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둘째로, 예수님은 정치적 반역자나 세상적인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셋째로, 진리가 오히려 거짓된 종교권력과 정치적 야합에 의해 배척당하는 역설이 드러난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봉하며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으나, 정작 그 메시아가 오시자 스스로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처럼 이 장면은 ‘진리가 나타날 때 오히려 거짓과 위선이 폭로되고 심판을 받는다’는 진리를 단적으로 시각화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자세를 깊이 묵상해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예수님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왔다”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권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진리의 왕권”이라는 개념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는 세상 권력과 충돌하거나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거짓에 물든 인류에게‘생명을 주시는 통치자’로 오신 예수님의 위치를 인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결국 세상 권세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들, 즉 참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보여 주신 모습,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나 세상 속에 임하여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빌라도의 심문 장면은 예수님의 무죄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아들이시며 십자가에 이르시는 구속의 길을 걷게 되시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을 묵상할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 곧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현세적 권세자나 종교적 기득권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듯, 오늘날도 진리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참된 복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심지어 배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 진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방식이야말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이었다. 따라서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장엄하고도 온유한 모습은, 훗날 부활을 통해 입증될 승리의 싹이 숨겨져 있었던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심문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세상 권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여 준다. 세상의 왕권은 주로 폭력이나 위압, 정치적 책략, 군사력, 경제력으로 이룩되고 유지된다. 예수님 시대의 로마제국이 대표적이다. 반면 예수님이 보여 주신‘하나님의 나라’는 겉으로는 아무 힘이 없어 보이고, 십자가처럼 치욕적인 처형 도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능력이 선포되고 참 자유가 주어진다. 이 점이 바로 요한이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예수님의 ‘진리의 왕권’이다.

2.세상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긴장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는 말씀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해석과 적용을 낳았다. 어떤 시기에는 이 구절이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완전히 분리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세상의 정치·경제·문화 영역을 변혁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며,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정치적 관심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틀에 제한되지 않는 차원의 통치자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목적과 방법은 세상이 이해하거나 흉내 낼 수 없는 진리에 기반한다. 세상 권세자들은 이 진리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이익과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속한 자들만이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단언하심으로써, 이 진리가 사람들의 표면적 지위나 능력과 무관함을 밝혀 주셨다.

이 진리와 세상 권세의 긴장은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종교권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셨고, 결국 빌라도라는 세속 권력자의 재판정을 거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는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세 번이나 고백했다. 이는 곧 세상 권세조차 예수님의 무죄함과 순결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정치적 책략이나 무력 동원으로 자신을 보호하거나 빌라도에 맞서지 않으셨으며, 침묵 가운데 채찍질과 모욕을 감내하셨다. 이러한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왕권이 세상 권위자들이 추구하는 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 극명하게 부각된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무리는 왜 그렇게까지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까? 성전 체계를 뒤흔들고, 그들의 종교적 위선과 권위주의적 행태를 폭로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가르치는 이들의 위선을 낱낱이 드러내셨다. 이로 인해 종교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빌라도에게“예수는 로마에 반역하는 자”라고 모함하며,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집단적 압박을 가했다. 이는 겉으로 종교의 열심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메시아를 배척하는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빌라도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정작 자신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대면하고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인간의 악을 넘어서는 구원의 계획을 품고 십자가에 이르신다.

이 장면을 두고 많은 신학자들이, 빌라도의 궁극적 책임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책임은 각각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를 논의해 왔다. 누가 정말 예수님을 죽였나?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종교적·정치적 음모나 법정 재판의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 죄악 전체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된 구속 사역이라고 증언한다. 예수님께서 정말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죗값을 지고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구속 역사를 이루는 데에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죄책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 두려움 등으로 인해 정말로 ‘무죄하신 이’를 죽인 죄를 범했다. 동시에 이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지닌 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곧 누구라도 자신이 지닌 악함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참한 셈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빌라도와 예수님, 그리고 유대인 무리 사이에서 벌어진 이 논쟁과 심문의 과정을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의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님은 지금도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문제는 교회가 혹은 성도들이 진리에 속하느냐, 아니면 세상 권세와 야합하며 진리를 외면하느냐이다. 과거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배척했던 모습은, 현대 교회 안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곧 인간적 명예나 재산, 교권, 혹은 사회적 지위 등을 잃지 않으려고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면서도 겉으로만 종교적 열심을 표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매우 경계하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진리의 권세는 세상을 전복시키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죄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구원하는 것”임을 수차례 강조한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군중의 선택 또한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들은 때때로 폭력을 휘두르고 현실의 정치나 사회체제를 뒤집으려는 극단적 인물을 통해, 자신들의 울분을 해소하고 욕망을 투영하기도 한다. 바라바 같은 민란의 선동자는 때로 군중에게 통쾌함을 줄 수도 있으며, “이제 로마를 뒤엎고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체제를 세워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폭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 주님이 왕으로 오신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가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나라다.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볼 때에는 실패한 왕처럼 보이고, 무력한 희생자처럼 보이지만, 부활 후에는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자들은 세상의 가치나 방법론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함을 암시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이를 반복해서 설교하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한 영적 싸움이다”(엡 6:12)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눈에 보이는 정치적 대결이나 세력 다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사랑을 실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또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은둔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곳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하셨다. 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의미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요 20:21)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의 빛을 비추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 자기들만의 영역을 만든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고 하며, 거룩함과 구별됨을 유지하되, 동시에 세상으로 파송받아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증거해야 함을 역설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리를 바로 분별하고 붙드는 일이 아무리 교회나 성도에게 당연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열심을 갖고 있었고, “메시아를 대망한다”고 공언했지만,막상 참된 메시아가 오셨을 때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적대하고 거짓으로 모함하며 죽이려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진리가 그들이 누리던 종교적 기득권과 위선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형식적 종교생활에 안주하거나, 세속적 이익과 결탁하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참된 진리를 실천하기보다는 자기 편한 길을 추구하면, 결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결국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면서도, 눈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언제나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우리는 과연 어느 왕에게 속해 있는가’를 묻는다. 세상의 영향력과 명예, 물질, 혹은 편리함을 좇아서 진리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왕으로 사역하시는 방식’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사랑과 순종을 진리의 핵심으로 붙잡고 있는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나라는 무력과 획책이 아닌, 자발적 희생과 봉사,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확장된다. 그것이 제국의 힘이나 군중심리에 의존해 반역을 꿈꾸던 바라바와의 결정적 차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혹은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리와 사랑을 지키는 자세를 의미한다. 동시에 세상 권세자들이 “너희가 말하는 나라는 무엇이냐?”, “너희가 말하는 왕은 누구냐?”라고 물을 때, 예수님처럼 담대하고 명확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 속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권자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길이다. 그리고 이 고백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겸손과 온유, 사랑과 희생이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신뢰를 얻게 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거짓된 심판을 스스로 지고 감당하셨던 대속적 성격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도 무죄로 선포되었고,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길을 열어 주셨다. 만약 예수님께 죄가 있었다면, 십자가가 대속의 사건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죄도 찾지 못한’ 주님이 죽으심으로, 무고한 희생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 이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이며,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세상 권세의 심판대에 선 예수님은 사실 우리가 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대신 서 주신 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을 누리는 동시에, 그 사랑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왕권’과 ‘세상 권세’의 충돌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까? 대개는 아주 큰 정치적 박해나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직장이나 학교, 일상 속에서 진리에 반하는 유혹이나 타협의 압력이 늘 도사린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을 동원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또한 때때로 억울한 비난을 받더라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과 온유의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 이것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는 왕이 아니다, 진리가 없다’고 외치는 소리 앞에서, 예수님의 진리를 붙드는 자로 살려면 고난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과 영생, 곧 하나님 나라의 영화에 동참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도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재현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화려한 예배나 프로그램, 교세 확장에 몰두하면서 정작 진리와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무리가 될 수도 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마 7:21), 실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다름없는 행태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자신이 가진 정치적 계산 때문에 진리가 누군지, 혹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예수님을 릴리스하려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군중의 압박에 굴복해 무죄한 이를 사형에 내몬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외적으로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드러내신 참된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거부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상 권세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불의와 진리에 대한 배척, 그리고 종교적 위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한편, 예수님이 그 속에서 어떻게 참된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시는지를 알려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빌라도의 질문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 그리고 “너는 과연 어느 왕에게 속해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나는 진리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백이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야 하며,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또 우리가 몸담은 사회 속에서도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심문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죄함과 진리의 왕권을 발견한다.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과 빌라도가 거짓과 두려움, 이기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모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의 성취라는 사실을 목격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이로써 참된 권세가 무엇인지, 참된 왕이 누구신지가 드러난다. 이 왕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빌라도가 알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되며, 죄와 사망을 이기는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본문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정체성을 상기시키며, 진리를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언급하듯,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서도 진정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하고 있다. 교회 역시 때로는 세상 권세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옛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 권세 앞에서 담대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확고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빌라도의 심문 장면은 바로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심을 스스로 증언하신 사건이요, 빌라도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거나 알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폭로한 사건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완성하는 통로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를 알며 자유케 되는 길을 얻었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장재형목사가 거듭 권면하듯 진리이신 예수님을 삶의 왕으로 모시는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왕이신 주님을 따라, 겸손히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함으로써, 세상도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받은 강력한 메시지이자 과제다.

www.davidjang.org

초대교회의 성령 역사 – 장재형목사

1. 초대교회와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2장과 3장, 그리고 4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모습을 확인할수 있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한 두려움으로 충만했고, 그 결과기사와 표적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설명한다. 한편 그 기사와 표적이란 단순히 초자연적인 기적, 예컨대 40년 된 앉은뱅이가일어나는 기적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 곧 소유의 비움과 나눔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사도행전 2장 43절 이후를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는 말씀처럼 당시의 교회가 눈에 보이는 기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이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이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유를 놓아버리고 ‘비움’에 이르게 된 근본 변화를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모습은, 성령이 임재할 때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던 소유욕과 탐심을 극복하게 해주는놀라운 은혜의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 있던 장애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선언하며 그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살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믿음의 풍성함이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함께 나누고 나아가 자신 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함을 이웃과 공유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소유를 ‘전부’로 여기지 않았다. 이 부요함이 바로 초대교회의 활력과 진정한 자유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4장으로 넘어가면,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기사와 표적이 계속됨에 따라 외부의 핍박도 커지고, 동시에교회 내적으로도 더 깊은 기도의 삶이 요청된다. 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고 찬미하며 기도하기에 힘쓴다는 사실은, 교회의 궁극적인 에너지가 사람의 열심이나 단순한 열광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죽음마저 이긴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금도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성도들의 삶을 통해 구현된다면,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떨쳐 낼 수 있다는 것이 장 목사의 설명이다.

초대교회가 부활 신앙을 체험적으로 붙들고,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실현된다는 확신이생겼다. 그 확신이야말로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전의 삶을 뒤집어엎고, 서로 헌신하며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놓아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동력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소유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과 금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도 기뻐하는 자유함이 그들 안에 임했다. 이 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의역동성을 거듭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재산을 나누고 떼어 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끊임없이 인간을 지배해 온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충만한성령의 역사”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나아가 사도행전 4장 32절 이후에 등장하는 바나바라는 인물이 눈에 띈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지만 “밭을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이 당시에 얼마나 대담하고 과감한 것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나바의 헌신이야말로 초대교회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라고 말한다. 바나바는 단순히 재산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했다. 그 고백이 있어서야 비로소 참된 ‘나눔’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이름 뜻 자체가 “위로의 아들”(권위자, 위로자)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 40장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말씀이선포되는데, 바나바가 보여준 삶은 바로 그 말씀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다. 성도들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억압에서 벗어나게되는 미래를 예언했던 구약의 외침이, 초대교회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바나바의 헌신이 증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모든 맥락을 종합하며, 초대교회가 단순한 ‘과거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재 교회가 회복해야 할 참된 정체성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물질과 권력을 나누어 주고, 서로를 위해 살며, 더욱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당시 교인들이 가진 가장 큰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 한 담대한 믿음이었고, 그 믿음이 실제 삶의행위로 나타났을 때 세상은 놀라운 기적과 표적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2.  소유의 비움과 나눔

초대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소유의 비움”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소유를 내려놓기 시작했고, 자신의 재산과 재물을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4:32)라는 구절이야말로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소유가 극복된다”는 표현을 주목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소유욕은 거의 모든 문제의 근본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전쟁과 다툼, 착취와 불평등, 불의 등은 소유에 대한 욕망, 혹은 탐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마치 에덴의 회복과 같이 소유를 뛰어넘는 사랑과 나눔을 실제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폭로해 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때 핵심이 “공유”라고 말한다. 진정한 공유는 단순히 재산을 똑같이 분배한다거나, 소유를 완전히 금지한다는식의 획일적인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성도들이 자기 내면에서부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곧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내 것이라고 주장하던 것”을 풀어놓을 수 있게 된다. 소유를 비우고, 내 것을 너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초대교회가 맛보았던 “성령의 부요함”이라고 장 목사는강조한다.

사도행전 4장 34절 이하에서는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아예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초대교회가 보여 준 가장 극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이유를, “성령 안에서 이미 채워진 충만함”이라 표현한다. 소유를 내려놓게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단순한 열정이나 인간적인 선의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들이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이미 모든 것을 얻었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재물을 움켜쥐지 않아도, 자신의 장래를 걱정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이나를, 나의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곧 모든 교회가 똑같이 재산을 공유해야만 한다는 어떤 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소유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기쁘게 자발적으로 내어놓았고, 그 결과로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을 뿐이다. 즉, 초대교회는 억지나 강요로 기부를 강제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바나바가 자발적으로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자발성’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의 증거라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의 강제로 인해 억지로 헌금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 초대교회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움직였고, 그 결과로 사랑과 헌신이 자발적으로 넘쳐흘렀다. 이것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소유가 극복”되는 건강한 형태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현대 교회가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주의와물질주의가 만연하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본능적 욕구, 그리고 무한 경쟁 속에서 남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나 강하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세상의 흐름에 그저 휩쓸려 간다면, 초대교회의 이상이었던 사랑과 나눔, 그리고 물질적 풍요보다 중요한 영적 부요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갱신과 개혁을 진지하게 원한다면, 장재형 목사가제시하는 “소유의 비움과 나눔”의 가치에 다시금 눈을 떠야 한다. 진정으로 성령에 사로잡히면, 소유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며, 우리는 자유롭게 필요한 곳에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현실적인 필요’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의 공동체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즉, 정말로 궁핍한 형제자매에게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또 어떤사람은 상대적으로 필요가 덜했기 때문에 좀 더 적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듯 실제적인 필요를 중심으로 공유와 나눔이이뤄졌다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나눔은 그저 환상적인 ‘공산주의’나 ‘공동생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사랑이 실제 상황에 적용되어 구체적으로 열매 맺은 모습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필요중심적’ 나눔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본보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초대교회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이야기이다. 사람들은 4장 32절부터 37절에 나타난 ‘소유의 나눔’이라는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너무 가혹하고 어려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 바쳐진거룩한 것”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속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소속된 것이 되는데, 이를 뒤늦게 감추어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하려고든다면, 그 자체가 성령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3.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그리고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

사도행전 5장 1절 이하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의 가장 엄중하고 무서운 권징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전부를 내놓지 않고 일부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 감춘 일부 때문이 아니라, “속임”을 행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래 감추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속였다는 사실이 치명적인 죄가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성령의 사람은 속임을 간파한다”는 것을 부각한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보자마자 “사단이 네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작은 죄악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초대교회 공동체가 지니던 순수성, 투명성,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살던 공교회적 생활방식을 근본부터 위협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 앞에서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는, 그만큼 초대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대했음을 나타낸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한창 흥왕해 가는 시점에서, “거짓”과 “속임”이라는 악이 들어오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물론 우리가 읽을 때 이 사건이 너무 잔혹해 보이기도 한다. “그냥 헌금을 조금 덜 낸 것뿐인데,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라고의문을 품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에 대해, 초대교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강력하게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죄를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 취급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위엄과 성령의 거룩한 능력이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던 시대이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기만하는 일이 곧 ‘성령을 대적하는 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구약의 헤렘(바쳐진 것) 사상, 곧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은 절대 인간이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원리가 초대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바쳐진 소유를 속여서 일부를 취했다는 사실은, 일종의 ‘아간의 범죄’와도 같은 성격을 띈다는 것이다.

아간의 경우를 보면,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전쟁에서 이긴 뒤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는데, 아간이몰래 그 물품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숨겼다. 그 결과 공동체 전체가 패배하고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아간이 돌에 맞아죽고 나서야 다시 하나님의 승리가 임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도둑질하는 일에 대해 무섭도록 진지하게 다루는데, 이는 결국 인간이 생명과 재물을 포함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이런 ‘거룩의 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이사건은,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면 과하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당시 하나님의 위엄이 실제로 체험되던 교회 공동체에서라면 그만큼 엄중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교회가 무엇인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제로 임하는 곳인가, 아니면 단순히 종교 활동을 하고 인간적인 모임을 갖는 장소인가? 만약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면, 교회 안에서는 작은 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교회 안에서 완벽해질 수는없지만, 적어도 죄를 죄로 인식하고 돌이키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강조하며, 오늘날 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진지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 봉사를 하는 이유, 삶으로 예배하는이유가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인지, 혹은 그 안에 교묘한 자기중심적 욕심과 가면이 숨겨져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으로 인해 초대교회 안에는 다시 한 번 경건한 두려움이 임했다. 성경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행 5:11)라고 말한다. 그 두려움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교회를 파괴하는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마음, “우리가 정결해야만 교회가 산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교회가 정직하고진실해야 한다는 이 메시지는, 현대 교회가 무심코 흘려보낼 수 없는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더 큰 기적은 사실 겉으로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한 탐심이 성령의 능력으로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는 태도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물질의 문제가 가장 민감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의 상태인 셈이다. ‘내가 얼마나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소유를 초월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장재형 목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마주할 때,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부분이 없느냐?” 교회 안팎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령을 기만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봉사나 헌금을 하면서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숨은 동기가 있는지, 혹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일부를 감추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 문제를 외면한 채 “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나는 남들보다 더 큰 헌금을 한다”라는 식의 자기만족에 빠진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을 되풀이할 위험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살피고, 성도들에게도 바른 안내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가 물질적인 측면에서 투명하지 못하거나, 헌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지도자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를 도구화한다면, 그것은 곧 초대교회가 보여 준 순수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태도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지도자 스스로가 먼저 바나바와 같이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내려놓고, 온전한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도자는 교인들에게 희생을강요하기 전에, 자신이 진실하게 헌신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초대교회 정신에서 핵심은 “누가 더 많이 드리는지, 누가 더높이 평가받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각자의 필요를 채우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지”에 있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의 가장 빛나는 순간 뒤에 들이워진 짙은 그늘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사건을 통해 초대교회가 얼마나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였는지를 되새길 수 있다. 교회가 성령의 다스림 안에 있을 때, 작은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며, 그만큼 진리와 거룩함을 지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점을 현대 교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재정 비리나 권력 다툼, 교인 간의 분쟁 등이 세상에 드러날 때마다사회는 교회를 향한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소유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과 “정직, 그리고 투명함”이다. 이는 단순히 바깥으로 드러나는 매뉴얼이나 제도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한 내면의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과제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바뀌고, 그때부터 교회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 없이는 교회가교회다워지기 어렵다.

비단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설 때 생겨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한 마음과 한뜻으로 뭉쳐져서, 서로 사랑하며 소유를 통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 쉽게 꺾이지 않지만, 성령이임하면 탐심을 물리치고 오히려 자신을 낮춰 섬기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럴 때 교회라는 공동체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의식을거행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펼쳐지는 장이 된다.

결국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보여 준 ‘부활 신앙’과 ‘성령의 충만함’, 그리고 ‘소유의 비움과 나눔’이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요구된다고 설파한다. 우리는 모두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있고, 그 부활이 이미 시작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재물과 시간, 재능, 건강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삶의 자세가 교회 안에 넘칠 때, 다시 말해 교회가 “정직과 진실”을 회복하고 “두려움과경외”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때, 사도행전이 기록한 놀라운 부흥과 기적이 재현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장 목사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모든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초대교회가 성령으로 인해 변화를 경험했을 때, 가장 먼저드러난 변화는 “소유를 비우고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지닌 부활 신앙은 죽음의 공포마저 떨쳐 버리게 했으므로, 물질적으로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심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나눔’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통해, 이 공동체 안에도 죄의 유혹이 침투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 죄를 단호하게 대면했고, 그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오히려 더 정결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교회가 바로 이런 메시지를 붙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헌금과 재정 문제, 지도자의 청렴성, 교인들 간의 갈등과 불신 등은 결국 ‘소유’를 둘러싼 인간의 욕심과 탐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 안에거하는 교회라면, 마치 초대교회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식하며 두려워하고, 동시에 부활의 소망을 기쁨으로 붙들고, 서로 사랑하며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며, “정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공동체로구나” 하고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초대교회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경고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정직하며 성령에 붙드는 공동체를 이뤄 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리라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아울러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에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결국 초대교회는 기적과 표적이 단순히 외적인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표적과 기사는 더 큰 목적, 즉 사람의 마음과 삶이 거듭나는 증거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결정적인 ‘표적’은, 성도들의 삶이 바뀌어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변모한 사실에 있었다. 우리 역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기대하고, 부활 신앙을 중심에 두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히 엎드릴때, 비로소 소유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교회를 세워 갈 수 있다. 장재형 목사가 되풀이해 설파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초대교회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그저 과거의 유물이나 이상향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실질적으로 부여된가능성이자 사명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여전히 역사하시는 지금, 우리 모두가 그 부름에 정직하게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www.davidjang.org

십자가와 사랑의 실천 – 장재형목사

Ⅰ. 갈라디아서 6장의 배경과 율법주의의 문제

갈라디아서 6장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며, 이 편지를 통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교리에 휩쓸려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중심 진리를 재확인시키고자 한다. 갈라디아서는 초대교회 시절, 복음과 율법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혹은 복음은 율법의 멍에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해방하는지에대하여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서신이다. 특히 갈라디아서 6장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할례문제와 율법준수를 통한 구원론의 오류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박해왔다. 이를 통해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 곧 오직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핵심을 가르친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갈라디아서 6장의 의미를 깊이 살피면서, 왜 바울이 마지막 장에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물질적인 나눔’을 언급하며 편지를 마무리하는지 그 의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갈라디아 지역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자들이들어와서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 요소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충분치 않게 여기고, 구원을 좀 더 ‘확실하게’ 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전통적 의식인 할례가 필요하다고 떠들어댔다. 이들은 할례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전체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이 온전해진다고까지 확대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야말로 ‘다른 복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복음은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전하며, 구원에 할례나 율법의 어떤 규정도 결코 플러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해져야’ 한다면, 결국 “십자가의 능력이 불충분하다”는 결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1장부터 5장에 걸쳐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 진리를 바울이 논증하고, 5장 후반부에서는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6장에 들어서 바울은 이 성령의 삶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서로 짐을 져주는 것,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 등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적 사랑을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그 사랑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물질을 나누는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6절 이하에서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말씀 사역을 담당하는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맥락을 짚어가며, “사랑의 첫걸음은 용서와 관용이며 다른 이의 짐을 나누어 지는 것이고, 그다음은 구체적으로 재정을 나누고 물질을 도움으로써 그 사랑을 더욱 완전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특히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선행이나 악행이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는다”는 원리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바로 직전 구절에서 ‘가르침을 주는 자를 물질적으로 섬기는 것’이라는 맥락이 이어진다는 점을고려하면, 바울은 여기서 실질적인 ‘물질적인 심음’과 그 열매를 상당 부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심으면 더 큰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식의 기복주의로 흐르는 것은 결코 바울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바울이 ‘재물’을 말할 때에는 항상 두 가지 큰 전제가 깔려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가난한 자를돌보는 것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모습”이라는 점이며, 또 하나는 “우리가 마음껏 베풀어도 결코 결핍에 빠지지 않는 은혜”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이다. 고린도후서 9장에서도 “하나님이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현재 먹을 것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씨앗까지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마음껏 나누라는 권면이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 말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거두게 하심을 믿고 “선을 행하는 일에 지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물질적 나눔까지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를 두고, 교회 안에 혹시라도 “너무 돈 이야기가 빈번하다”라든지 “베푸는 것이 부담스럽다”라든지 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음을 바울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7절 상반부에서“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분명히 환기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물질을 나눌 때, 억지나 인색함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라”는 의미로도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갈라디아서 6장의 마지막 권면은 복음과 성령의 열매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할례당처럼외적인 율법 조항을 지켜야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자들과 달리, 바울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 돕고 나누는 삶”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가 6장 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강조하는 핵심 정신이다. 먼저는 교회 안에서 서로 돌아보며, 가난한 자가 없이 함께 살도록 물질을 나누고, 그 사랑이 교회 바깥의 세상에도 흘러나가게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장재형 목사는 매우 실제적으로 풀어주면서, 갈라디아서 6장을 ‘교회 안팎을 향한 실천적 복음’의 맥락으로 정리한다.

이로써 갈라디아서는 6장 10절까지 사실상 본론이 마무리되고, 11절부터 편지 결론부로 넘어간다. 바울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는데, 이는 대필을 맡긴 로마서나 다른 서신과 달리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직접 썼다는증거 혹은 안질로 인해 큰 글자로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암시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건, 바울은 그만큼 갈라디아 교회에 전할 이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느꼈고, 마지막에도 “여전히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오류를 재차 지적하며 다시는 갈라디아성도들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Ⅱ.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물질적 도움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랑’과 ‘나눔’을 언급하는 방식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사랑의 속성을 설명했다면, 갈라디아서 6장은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구현되어야 하는가”를 예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도시인 중심 선교에 익숙했던 바울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가는구체적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한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은혜로 거듭났지만, 율법주의자들의 교묘한 가르침에 흔들려 ‘다시 율법적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야 하나’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너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은 결국 서로 짐을 지고 실제로 돕는 데까지 이른다. 할례 여부나율법 조항 준수 여부가 아니라, 서로를 물질적으로 돌보고 진정한 공동체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참 복음의 실천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6장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구절은,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코이노니아(koinonia)’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2장이나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재산과 소유를 서로 통용하며, 누구도 궁핍하지 않게 서로 돌보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그 이상을 완벽히 실천했다는 것은 아니며, 바울은 교회마다 이 부분을 계속 권면하고 가르쳐야 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말씀을 전하는 자’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헌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는 척하거나 “설교자나 교사에게 굳이 물질적 보상을 해야 하나?”라는 식의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말씀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교사들, 선교자들, 목회자들을 방치해 두지 말고, 모든 좋은것을 함께 나누어라”라고 교훈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원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 예를 들어 목사나교사, 전도사, 선교사 등이 물질적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결코 공동체적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설령 돈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영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성경은 결코 물질 문제를 피상적 영역이라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물은 중요한 ‘영적 시금석’이자,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바울이고린도후서에서도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기쁨으로 연보하고 선행을실천하라고 권면한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6장 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은, 사랑이 행동으로, 특히 물질로 심어질 때 그 결과가 아름다운 열매가 된다는 영적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원리를 악용하여, “심으면 곧바로 배로 갚아주신다”는 식의 과잉된 번영신학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크다. 바울이 의도한 바는, “선행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원리다. 선행이 반드시 물질적으로만환원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나 공동체의 유익에서나,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풍성하게 거두게 된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기적인 욕망에 휘둘려 살아간다면 결국 썩어질 육체적 결과에 이를 것이지만, 성령 안에서 타인을 위하여 사랑과 선행을 심으면 영원한 가치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대조적 표현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갈라디아서 6장 9~10절의 권면—“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때가 되면 거둔다,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을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선교적 방향성과 윤리적 기초를 짚어준다. 선행을 지속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이타적 헌신과 나눔을 지속하다 보면 번번이 지치거나 실망하게 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돕는 이들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악용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 결국 우리가 행한 선은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kairos) 안에서 꼭 열매를 맺는다”고 격려한다.

이는 교회가 바깥 세상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라고 했는데, 우선순위가 교회 형제들을 먼저 돕는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이에게’라는 단서를 달아 교회 밖에 있는 궁핍한 이들도 돌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가난한 이웃과 약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윤리이며,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갈라디아서 6장 후반부를 보면,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는 바울의고백이 나온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오직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고, 우리의 존재기반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증명하려 했고, 심지어 이를 자신의자랑거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곧 “세상적 기준과 가치관은 더 이상 내게 효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분의 낙인(stigma)이 내 몸에 찍힌 자로 살아간다”는 바울의 다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즉 ‘세상에 대해 죽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구체적으로 묵상해보도록 이끈다.

한편, 6장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라는 말씀은, 외형적 표식이나율법 준수 여부가 아니라 ‘새 피조물(new creation)이냐 아니냐’가 관건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예루살렘회의(사도행전 15장)에서도 이미 결론이 났듯이,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에 ‘할례’ 같은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고, 바울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맞선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6:16)라고 하는 부분 역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포인트는, 갈라디아서가 ‘교리’로 시작했지만 결국 ‘실천’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복음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교리적 선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구현하고, 더 나아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결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은 일종의 “복음의 열매 맺음”을 마지막에 핵심적으로 다룬다.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의 섬김, 어려운 이웃에 대한 봉사, 말씀 사역자에 대한 물질적 돌봄, 이런 모든 실천은 결국“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라는 전언에 대한 구체적 답변이다.

이를 통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재정립하게 되고, 무엇보다 이 편지를 받은 갈라디아 교회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들도 “우리가 과연 진정한 복음을 붙들고 있는가? 혹은 교회 안팎으로 그 복음의 능력을 나누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점검하도록 촉구한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와 멍에를 씌우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데”(갈 5:13) 써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로 용서요 관용이며, 실질적 도움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기쁨이며, 교회가 세상에 보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모든 내용을 담아내는 장재형 목사의 강설은, “거룩한 교리와 가장 현실적인 물질의 영역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는지혜로운 가르침”으로 요약된다. 교리나 신앙고백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실제 삶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해방했을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우리의 재물과 시간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을 “사랑의 행함과 십자가 중심성”으로 맺어가는 것이다.

Ⅲ. 십자가 중심의 복음과 신앙의 완성

갈라디아서 6장의 마지막 구절들, 특히 6장 17~18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라는 고백과 함께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맺는 대목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품은 애정과비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거짓 교사들이 퍼뜨린 헛된 주장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 영적 고통을 겪어온 현실을 토로하는 동시에,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말라”는 강력한 당부다. 바울이직접 전해준 복음이 곧 진리이며, 다른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나 ‘율법적 전통’도 복음에 추가되거나 복음을 대체할 수 없음을최종적으로 선포한다.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Stigma)’이 있다고 말한다. 이 ‘스티그마’라는 말은 노예나 가축에게 찍는 낙인, 혹은 군인이 소속을 표시하는 문신 등을 가리킨다. 이는 곧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가장 적극적이고 분명한 표시다. 실제로 바울은몸에 수많은 매질과 핍박의 흔적을 품고 살았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고, 돌로 맞고, 채찍질당하는 등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 얻은 흉터들은 외적인 폭력의 산물일 뿐 아니라, 동시에 바울이 ‘예수의 종’이며 ‘예수께 속한 자’라는 낙인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바울의 몸에는 복음전도자로 살아온 흔적이 선명하게 배어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바울의 영적 자랑이자 그의 사도권의 증표였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작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은 육체의 모양, 즉 ‘할례’와 같은 외적인 표지로 자랑하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가진 표지, 즉예수의 낙인은 진정한 복음 사역의 산물이고,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천명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입힌‘종교적 표식’을 자랑거리로 삼으려 했지만, 바울에게는 그러한 외적 표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도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으며, 6장 14절에서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라고 고백했다.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바울의 실제적 삶이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결말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자”로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교회를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결론이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달하고자 했던 모든 가르침의 종합이며, 또한오늘날 교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도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스며들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지켜야 한다, 저 의식을 행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복음에다 뭔가를 보탠다. 그러나 복음은 본질적으로 완전하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다. 여기에 다른 무엇을 더하면, 그것은 더 이상 ‘오직 십자가’가아니라 ‘십자가 플러스 무언가’가 되어버리고, 그 순간 복음은 본래의 순수함을 잃고 왜곡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잘못 해석하여, 방종과 책임 회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니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결코 참된 복음의 열매가 아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자발적 헌신과 나눔”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물이 바로 갈라디아서 6장이제시하는 “사랑의 짐 나눔”이며, 말씀을 전하는 자와의 “좋은 것 나눔”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그 십자가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실천이 결합할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장재형목사는 “이 온전함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동시에 갈라디아서가 보여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정리한다. 실로 갈라디아서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신학의 정수와 교회 공동체 윤리의 핵심을 모두 담고 있다. 바울의 절박함과 열정이 곳곳에서 느껴지며, 그가 교회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염려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6:18)라는 마지막 인사는,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진심 어린 축복이자, 편지를 읽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축복의 메시지다.

이 축복은 단순히 인사치레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를 결론짓는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자격이나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이웃에게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는 말씀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율법주의나 행위주의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도 허용되지 않는다. 참된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를 나타내는 열매를삶의 자리에서 맺게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짐을 나누고, 교회를 넘어 세상의 소외된 이웃에게까지도 착한 일을 베풀며, 무엇보다도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태도—이것이 갈라디아서가 요청하는 ‘믿음의 행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우리 시대 교회의 모습과 관련지어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러 교회는 재정 문제에 봉착해 있고, 때로는 헌금문제를 두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헌금을 강조하면 사람들이 부담을 느낀다”고 우려하여 아예물질에 대한 언급을 꺼리기도 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이 보여준 태도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물질 문제를 투명하고 성경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곤궁에 처해 있다면, 공동체가 그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도리요,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풍성한 은혜 안에서 서로를 돕는 것”이라는 관점이 성립되어야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는 길이다.

또한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가 있다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돕고 세워주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가르침을요약한다. 교회 안에서 소외되는 이가 없어야 하며, ‘믿음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가족인 만큼, 그들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쏟고실질적인 도움을 건네라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 밖의 세상에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자들이존재한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서도 나아가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예수님 말씀처럼, “목마른 자에게 물 한 그릇주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자각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6장은 “오직 십자가”라는 교리적 중심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을 강력히요청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죄에서 해방되었다면, 이제 그 은혜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다. 교회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은 이로서 서로를 돌보며, 나아가 세상을섬기는 데에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결코 세상의 칭찬을 얻으려는 목적이나,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자기과시에 빠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그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결국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보여준 메시지는, 율법의 멍에와 사람의 의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은 사랑으로 발휘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할례’를 내세우며 그럴듯한 종교적 의식을 강요하는 세력이 교회 안에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면, 교회는 복음을 왜곡하며 점차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반면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실제로 실천될때,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세상에도 소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에서 갈라디아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임을 분명히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은연중에 ‘율법주의’가 스며들어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반복되어 왔다. 중세교회에서는 면죄부 판매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고,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현대에도“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각종 규정 준수”를 복음보다 더 강조하는 풍조가 없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 6장은 그 어느시대에도 변치 않는 복음의 핵심을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매우 중요한 장(章)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십자가 중심”이요,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사람들이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 18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말하며 끝을 맺는다. 사도 바울은 서신마다 맨 마지막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원하는 축복의 인사를 담았다. 이는 “은혜로 시작된 신앙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혜로 붙들려야 한다”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신학적 선언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복음의 자유’도 결국 이 은혜의 표출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일관되게 붙드는 원동력도 역시 은혜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주신 사랑과 용서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기에, 이제 우리는 영원토록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은혜가 나를 통해 이웃에게, 그리고 세상에 흘러갈 때, 교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빛으로 존재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거듭 강조하며, 복음의 길은 결코 ‘나 혼자만 잘 믿어 천국에 가는’ 개인적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과나눔으로 ‘공동체와 세상’을 섬기는 ‘확장적 구원’의 개념임을 상기시킨다. 갈라디아서 6장의 강조점은 바울이 그토록 사랑했던갈라디아 교회가 이 원리를 실행함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혼돈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동시에 이 말씀은 21세기의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각자의 삶 속에서 “남의 짐을 지고, 배고픈 자와 궁핍한 자를 돌아보며, 복음을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궁극적으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되 지치지 않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한다.

이처럼 갈라디아서가 종결부에 남기는 당부는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기쁨에서 비롯된‘능동적 실천’이다. 그 실천이 성도 개개인을 통해 드러날 때, 교회는 세상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한다. 율법으로 규정된 ‘할례’가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받은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하나님께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하여 가르쳐주신 ‘참된 자유’의 길이자 ‘성령의 열매’가 무르익어가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6장은 복음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는 교회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흔들림 없이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공동체를 세워 나가라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요, 그 증거는 말이나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 사랑의 행위로 나타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복음이 단지 교리적 체계나 신학적 담론을 넘어 “공동체와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재차 선포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6장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삶에서 실천한다면, “내가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바울의 확신과 열정이우리 안에도 살아 움직이리라는 소망을 갖게 된다. 그렇게 교회는 시대를 뛰어넘어 줄기차게 복음의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며, 율법주의나 세속주의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거룩한 공동체로 성장해갈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인사를 곱씹으며,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울의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보화 같은 결론이며, 갈라디아서를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믿음이 구체적인사랑의 행위로 결실할 때, 교회는 참된 자유를 소유한 공동체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선한 도구가 된다. 할례나 무할례가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서 서로를 섬기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예수의 낙인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어 선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이 결론이 곧 갈라디아서 6장의 진수다. 장재형 목사가 그 핵심을 우리 시대에 맞게 풀어내면서,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은혜를 힘입어 이웃을 섬기자”는 권면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맥을 정확히 이어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아멘.

낙심을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 – 장재형목사

  1. 낙심하지 않는 믿음의 필요성과 고린도후서 4장의 선언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도전과 역경이 있습니다. 실패나 질병, 관계의 단절과 재정적 곤란, 예기치 못한 사고 등 다양한 상황이닥칠 때, 우리는 종종 ‘낙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낙심이 깊어지면 의욕이 떨어지고, 삶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며, 극단적으로는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지는 단계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낙심’을 결코 외면하거나 미화하지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인물이 낙심을 경험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 줍니다.

낙심 문제를 다루는 핵심 본문으로, 고린도후서 4장이 대표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반복(1절, 16절)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도시를 순회하다가, 돌에 맞아 의식불명직전까지 가고, 때론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고생했습니다(고후 11장). 그런데도 고린도후서 4장에서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당해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8절 참조).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했을까요?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 안팎에서 사역하며, 고린도후서 4장이 주는 ‘낙심 극복의 비결’을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삶에적용하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그는 “바울이 말한 낙심 극복은 단순한 정신력이나 긍정주의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에 뿌리를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하는데, 여기서‘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질그릇’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낙심을 초래할 수밖에 없지만, 그안에 담긴 복음이 놀라운 힘을 발휘해 낙심을 뛰어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과 보배’ 비유가 곧 고린도후서 4장의핵심 주제이며, 장재형 목사는 “이해는 쉬워 보여도, 실제 삶에서 이 비유를 붙들면 낙심을 정복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된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겉사람이 후패해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선언합니다(고후 4:16). 이는 현실적 어려움이 영적 성장의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듯해도, 복음에 뿌리를 둔 신앙인은 오히려 내면이깊어지고 단단해진다는 역설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서신을 써 교회를 격려하고, 다른 성도들의 낙심을돌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들어 “낙심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적 현실이지만, 복음이 살아 있는사람에게 낙심은 결코 최종 결론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낙심 문제는 기독교 신앙 전체가 공유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한 해를 돌아보거나 새로운 시기를 준비할 때, 혹은 갑작스런 시련을 마주쳤을 때, 많은 성도가 낙심을 경험합니다. 교회가 이 부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복음의 위로와능력이 막연한 구호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어떻게 낙심을 극복하고,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이를 도울 수있을까요? 다음 소주제들에서,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과 고린도후서 4장을 토대로 한 ‘낙심 극복 로드맵’을 살펴봅니다.

  1. 질그릇과 보배: 낙심 극복의 신학적·영적 원리

‘낙심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을 이해하려면, 고린도후서 4장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구절을 깊이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연약한 우리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부릅니다. 질그릇은 쉽게 깨지고, 특별히 빛날 것도 없고, 가치가 높지 않습니다. 반면, 그 안에 담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구원을 가져다주는 능력 자체입니다. 바울은낙심과 직면한 인간이, 이 복음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 인간의 연약함(질그릇): 낙심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 때문입니다. 아무리노력해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거나,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 인간은 쉽게 의기소침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질그릇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스스로 교만해지거나 반대로 절망에 빠지는 두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고 말합니다. 즉,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면, ‘내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아도취에 빠지지도 않고, ‘난 도저히안 되겠다’는 극단적 절망에도 고착되지 않는 균형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2. 복음의 능력(보배): 질그릇이 가진 연약함과 대조적으로, 보배인 복음은 무한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 사함과 영생의 선포는, 세상의 어떤 문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장재형 목사는“낙심은 대부분 우리의 한계나 잘못, 혹은 환경적 압박을 볼 때 생기지만, 복음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지와사랑을 보여 준다”고 강조합니다. 낙심에서 벗어나려면, 이 보배를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은혜와 긍휼에서 시작된 직분: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낙심 극복의 시작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직분(목회자, 장로, 권사, 집사 등)은 물론, 교회 봉사와 사역 전부가 사실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원래 내가 할 만해서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믿음을붙든 교회는 흔들려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4.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고린도후서 4장 18절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합니다. 낙심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핍과 실패에 집중할 때 커집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바라보면, 지금의 어려움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낙심보다 더 큰 차원의 희망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원한 시야’가낙심 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함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낙심을 제대로 극복하려면, 질그릇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 안에 담긴 보배인 복음의 역설을 이해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낙심은 연약함과 환경 탓으로만 돌려선 안 되고, 복음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라고진단합니다. 교회가 이런 복음 체험을 돕도록 예배와 사역을 설계한다면, 낙심이 단지 ‘부정적 감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신앙’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낙심 없는 공동체를 향한 교회의 사역 방향

낙심 문제는 개인 심리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 전체가 함께 겪는 갈등, 세속화, 재정 문제 등으로 인해 성도들이 낙심할수 있고, 사역자가 낙심에 빠지면 공동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의도적으로 낙심 극복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 예배와 말씀 중심: 예배 시간에 복음의 본질을 분명히 설교하고, 고린도후서 4장 같은 본문을 통해 낙심이 인간의자연스러운 상태지만, 복음이 이를 넘어설 수 있음을 반복해 주지시키면, 성도들은 점차 낙심을 ‘극복 가능한 것’으로인식하게 됩니다.
  • 소그룹과 목양적 돌봄: 낙심한 성도를 방치하지 않도록, 교회는 구역·셀·목장 등 소그룹 시스템을 잘 운영해야 합니다. 구성원끼리 서로 근황과 기도제목을 나누며, 낙심이 깊은 사람을 우선적으로 살피고 격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 낙심이 장기화되지 않습니다.
  • 투명한 운영과 소통: 교회 내 갈등 중 많은 부분이 재정·인사·정책 결정의 불투명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곧 낙심으로이어지기 쉽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세상보다 더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지도부가 주요 내용을성도에게 솔직히 공개하고 의견을 수렴하면, 성도들도 낙심보다 신뢰와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
  • 사역자들의 영적 관리: 목회자나 교역자가 낙심하면, 교회가 전체적으로 동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역자들에게영적 재충전(휴가, 재교육, 동료 모임)을 지원하고, 번아웃에 빠지지 않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는 등 제도적 장치를마련해야 합니다.

특히, 크리스마스(성탄)나 부활절, 연말연시 등 특별 절기를 활용해, 낙심자를 초청하고 복음을 심도 있게 전하는 기회를 마련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낙심 극복 집회’나 ‘연말 감사·간증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해 동안 낙심했다가 기도와말씀으로 회복된 이들의 간증을 공유하면, 교인들과 이웃들에게 큰 울림이 전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 “낙심에 빠진 사람을향해 ‘주저앉지 말라, 교회로 와서 함께 회복의 길을 찾자’고 초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단순히 축제 분위기를내는 ‘행사장’이 아니라, 실제로 영혼을 돌보는 ‘치유 공동체’로 기능하게 됩니다.

또한, 낙심 극복 문화는 교회 내부에서만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로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실직이나 파산, 질병으로 낙심한주민을 돕는 구제 사역이나,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여 ‘낙심 중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복음을 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처럼 낙심한 이웃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가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행하고 있구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안일하게 내부 신앙 행사에만 치중하면, 교인들조차 낙심이 쉽게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 바깥으로 나가 ‘낙심자’를 돕는 과정에서 성도 스스로가 복음의 힘을 새롭게 체험한다”고지적합니다.

  1. 크리스마스와 낙심 극복: 영원한 소망으로 초대하는 교회

크리스마스(성탄절)는 교회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 좋은 절기입니다. 그러나 여러 이벤트와 행사에몰두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왜 중요한가?”라는 핵심 질문을 소홀히 다루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크리스마스를 “낙심한 이들을 복음으로 초대하는 시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셔서, 가장 낮은자리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지셨다는 사실은 고린도후서 4장의 ‘질그릇과 보배’ 개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 낮아지심과 질그릇: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신적 영광’을 온전히 포기하고, 우리의 연약한 상태를 몸소체험하셨습니다. 이 모습은 질그릇 같은 인간의 처지에 친히 들어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 십자가와 보배: 예수님의 탄생은 결국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집니다. 복음은 이 ‘보배’가 왜 인간에게 필요하고, 그리스도가 어떤 구원을 이루셨는지 보여 줍니다. 낙심의 끝은 사망 같아 보이지만,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신사건이야말로 낙심을 깨뜨리는 결정타입니다.
  • 영원한 소망: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을 선언합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영원’을 실제로보여 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연말에 사람들이 허무함을 느낄 때, 교회는 이 영원한 차원에서 해답을 주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연말·성탄 시즌에 낙심자를 초청해 “낙심 극복”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나 말씀 사경회를 열면, 큰 호응을얻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본문을 중심으로 낙심과 복음의 상관성을 풀어 주고, 실제 사례(간증)와 소그룹 토론을결합해 진행한다면, 교인들뿐 아니라 방문객들도 ‘이 교회는 행사만 하는 게 아니라, 내 낙심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주는구나’라고 느낄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너무 종교적 용어만 나열하지 말고, 현실적 고민을공감해 주면서 성경의 원리를 자연스레 연결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또, 이 기회를 통해 새로 교회에 온 사람들이 복음을접하고 낙심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면, 그 자체가 신앙공동체 안에서 큰 기쁨과 축하의 이유가 됩니다.

나아가, 성탄절을 맞아 교회가 지역사회에 구제와 사랑을 실천할 때도, 낙심 극복의 메시지를 함께 전할 수 있습니다. 독거노인이나 소외된 계층에게 선물을 나누면서, 단순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지셨듯, 우리도 이웃의아픔에 동참한다”는 영적 의미를 공유하면, 주는 이나 받는 이 모두가 ‘낙심을 이기는 복음’을 더욱 현장감 있게 체험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성탄절의 본질적 의미—‘낙심 중에도 찾아오신 하나님’을 실제 섬김으로 증명한다면, 사회는 교회를 통해 “정말복음이 낙심을 깨뜨리는 힘이 있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낙심을 넘어서려면, 교회 내부에서 고린도후서 4장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여러 가지 사역과 문화를 정비해야합니다. 예배와 말씀에서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고, 소그룹과 리더십 운영에서 낙심자를 돌보며, 크리스마스 등 절기에 낙심한영혼을 복음으로 초대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 교회 전체가 “낙심 없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과정을 ‘복음의 실제화’라고 부르면서, “복음이 머리 지식이나 교리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낙심이라는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삶의 능력이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에 진정한 희망을 전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복음의 비밀 – 장재형(장다윗)목사

  1.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영광의 소망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골로새서 1장 24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사도 바울이 보여 준 ‘고난’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의를 통해 고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반드시 영광을 동반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단순히 고통을 긍정한다거나 고난 자체를 미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겪게 되는 고난이 우리 안에 숨겨진 ‘영광’을 드러내는 길임을 알려 주는 가르침이다. 특히 골로새서 1장 24절의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믿는 자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지표가 된다. 목사는 여기서 바울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기쁨’으로 요약함으로써, 세상적인 시각과 달리 믿음 안에서 극심한 환란이나 역경에 처했을 때조차도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향해 가는 통로임을 되새기라고 역설한다.

장재형목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로마서 등 여러 서신에서 보여 주는 고난 이해를 함께 살펴보길 권면한다. 예컨대 로마서 8장 18절에 언급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말씀은, 고난과 영광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고린도후서1장에서는 바울이 고난을 통해 더 깊이 하나님을 의뢰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이런 고백이 단지 사도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의 법칙’임을 강조한다. 즉, 고난이 올 때 그저 슬픔이나 좌절만이 아니라, 고난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을 신뢰하기에 기대와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직접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던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조차도, 자기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중에도 전혀 복음이 멈추지 않음을 전해 준다. 장재형목사는 빌립보서를 인용하며, 바울은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도리어 복음이 더 진보되었다”고 외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장재형목사는,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중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쓰여진다는 사실을 재차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고난은 주의 나라를 위한 고난이며, 십자가를 통과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거룩한 길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영광도 없음을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마땅하며, 여기서 바울은 “이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나아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는 데에 기쁘게 ‘채워 넣는’ 것으로 보았음을 시사한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미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졌으므로 ‘남은 고난’이 있다는 표현이 다소 모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남은 고난’이란 궁극적인 구원 사역이 세상 가운데 교회를 통해 펼쳐지고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가 함께 짊어지고 동참해야 할 몫임을 자세히 풀어 낸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문을 완전히 여셨지만, 세상 끝날까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길을 걸으며 겪는 모든 수고와 어려움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자기 몸에 채워가면서, 곧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신이 당하는 모든 환란과 역경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고난이 영광으로 바뀌는 실체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이런 바울의 삶과 고백을 꼭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진정한 고난 이해는 단순한 “인내”나 “긍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영광’과 직결된 신앙적 통찰이다. 고난이 미치는 영향, 고난이 이끄는 방향, 고난이 가져다 주는 결과를 모두 살피면서 고난을 영광의 문으로 보고, 또한 그 고난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장재형목사는 고후 4장을 자주 언급하는데, 바울이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은, 믿음 안에서 고난을 이해하는 자의 기백을 여실히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이 하늘에 속했고,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시며, 장차 부활과 영원한 나라가 기다린다는 확고한 확신 위에서만 가능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결코 뜬구름 잡는 맹목적 희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체적 사건 위에 세워진 ‘실체적 소망’임을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나아가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5~27절에서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이 복음의 비밀이 만대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것이라고 표현하는 부분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장재형목사는 과거부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류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었으며,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큰 확신과 기쁨을 주는 메시지라 강조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원의 문이 모든 이방인에게 열리게 되었고, 그 결과 골로새교회나 오늘날의 교회까지도 이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궁극적으로‘영광의 소망’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사도 바울이 구원을 ‘비밀’(미스테리온)이라 칭한 이유를 설명하며, 우리는 그 오묘한 비밀이 드러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와 감격을 누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는 “현재의 고난은 결코 끝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가벼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고난을 만나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이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길은 곧 부활과 상급, 그리고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24절의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바울의 역설적 표현이 가능해지며,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곧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가르친다.

  •  하나님의 구원 계획, 복음의 비밀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 1장 26절과 27절에 언급된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라는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헬라어로 ‘미스테리온’이며, 이 단어가 ‘미스터리’의 어원이 된다. 바울은 이 비밀을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선포하는데,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곧 구약 시대로부터 예언되어 왔지만 온전히 파악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인간 구원 계획’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결정적 모습을 드러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에베소서 3장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이방인에게까지 드러났다”고 말하는데, 장재형목사는 이 바울의 논지를 따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만의 구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로 확장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9~11장을 거론하며, 본래 선택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다는 바울의 선포가 얼마나 역설적이면서도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인지를 풀어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11:33)라고 노래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하나님의 ‘비밀’이 어떻게 인류 역사 속에서 펼쳐져 왔는가를 잘 보여 준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이 특정 민족이나 특정 집단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열려 있다는 점이, 복음의 본질적‘보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어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의 핵심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정의한다.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이어지는데,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특별히 강조한다. 즉, 복음의 비밀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지식이나 사실이 아니라, 믿는 자의 내면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삶 가운데 실제로 작동하는 능력이며 관계라는 것이다. 이 관계성은 곧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다”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내주하시는 영이 구원의 핵심 동력임을 지속해서 설파한다. 이는 단순히 회개 기도를 드리거나 어떤 교리를 수용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비밀은 “나의 죄가 단번에 사함받고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 성령의 거룩한 내주,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포함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골로새서 1장 26~27절에 담긴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바울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아우른 보편적 교회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골로새교회와 같은 이방인 중심의 교회도 이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게 되었고,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도 이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 자체가 바로 “복음의 비밀이 만민에게 확장되었다”는 증거다.

장재형목사는 이토록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내 삶까지 임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감격을 놓치지 말라고 역설한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신앙이 단지 개인적이고 우연한 선택이나 주변 환경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만대 전부터 준비하신 구원 계획 안에 우리가 포함되었다는 경이로움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단순한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 장엄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동참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나타났다”는 이 한 문장 속에 얼마나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라고 거듭 강조한다.

나아가,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바울은 사도행전 28장에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장재형목사는 이 불신앙의 신비를 가리켜, “하나님이 그렇게도 환히 열어 놓으신 복음의 길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장재형목사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선교하고 목회자들을 세우는 과정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음에도 듣지 못하는 자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을 많이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한없이 기뻐하는 자들도 많이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결국 복음의 비밀을 ‘보게 되는가, 보지 못하는가’는 인생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며,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처럼 복음의 비밀은 감추어져 있으나 결코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자들에게 열려 있으며, 그 영광의 한복판으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이 복음의 비밀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교파나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구상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었으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온 세상에 적용되고 있는 광대한 구원의 서사를 말한다. 그리고 그 서사 속에 바로 우리의 신앙이 위치한다. 이런 의식이 분명해질 때, 신앙 생활은 그저 일상적인 의무나 습관에서 벗어나, 초월적이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드라마에 참여하는 기쁨으로 가득 찬다.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복음의 비밀을 붙잡은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성령의 내주와 성도의 삶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 1장 28절과 29절의 내용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이 지향하는 ‘성도의 완전한 모습’에 대해 강조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골 1:28)는 구절이 그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두 가지 핵심 동사가 눈에 띈다고 말한다. 바로 ‘전파한다’와 ‘가르친다’는 것인데, 성도는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요 동시에 그 복음의 깊은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서 양육하고 세워 가는 스승의 역할까지 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명하신 대사명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즉,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점을 장재형목사는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바로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듯이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최선을 다해 수고하기 때문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설명한다. 여기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는 분명 성령이시며, 바울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힘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견디고, 위험을 감수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함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3장 16절, 6장 19절을 자주 언급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구절을 통하여,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과 욕망에 지배되지 않고,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거룩한 전(殿)이 되었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사실은 구원을 받았음을 가리키는 결정적인 증거인 동시에, 성도의 매일의 삶을 이끌어 가는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성령 내주의 교리를 단지 교회에서 배우는 ‘개념’이나 ‘이론’으로 두지 말고, 실제 삶에서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날마다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언급된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인데, 이는 성령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 맺게 되는 성품들이며, 믿는 자로서 자아가 변화되는 가장 분명한 지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성령의 내주와 함께,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을 생각할 때 ‘청지기’라는 표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바울은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라고 말하는데, NIV 성경에서는 이 ‘경륜’을 ‘청지기직(stewardship)’으로도 해석한다. 이는 마치 집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종처럼, 우리의 삶과 재능, 물질, 시간, 그리고 복음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아 ‘잘 관리하고 운영해야 하는 책임’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청지기적 책임감이야말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필연적 태도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사실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며, 나는 그것을 ‘복음 전파’와 ‘이웃 섬김’,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에 충성스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종종 영적 권태나 무력감에 빠질 때가 있는데, 이는 “나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거나, 혹은 “교회를 섬기는 일은 너무 많은 희생과 고난을 요구한다”는 식의 인간적인 한계 인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보여 준 모습에서 보듯이, 진정한 변혁의 힘은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로부터 오며, 그분이 곧 성령이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더라도, 결국 골로새교회나 빌립보교회 등 곳곳에 복음이 자라나는 것은 ‘바울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성령을 의지하라, 내주하시는 성령을 매순간 인식하라”는 권면을 아끼지 않는다. 성령 없이 자신의 힘으로만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면, 그 시도는 반드시 한계에 부딪치고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선교지와 각국 교회에서 경험한 사례들 역시, 성령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어떤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도들이 기도함으로 놀라운 문이 열리고, 박해 가운데서도 교회가 오히려 더욱 견고히 서는 일들을 생생하게 체험했다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그는 “주를 섬기는 가운데 닥쳐오는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바울의 선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교회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동일한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다. 고후 4장에서 바울이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노래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어떠한 역경과 박해 속에서도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성도의 특권이자 능력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단순히 ‘고난을 이겨 내는 존재’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복음 전파와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일 자체가 이미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재형목사가 만난 많은 교회 리더와 성도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거나 핍박이 심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예배와 헌신을 통해 큰 기쁨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는 결코 세상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기쁨이며,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처럼 골로새서 1장 24절부터 29절까지는 ‘고난과 영광’, ‘복음의 비밀’, ‘성령의 내주와 청지기직’, 그리고 ‘복음 전파와 성도 양육’이라는 주제들을 한데 아우르고 있으며, 그 모든 주제를 하나로 묶는 핵심 연결 고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끝으로 강조하기를, “이제 우리가 이 진리를 붙들고 일어서야 한다”라고 한다. 믿음의 길이 결코 꽃길만은 아니지만, 그 길이 좁고 험해도 주님이 앞서 가신 길이며, 성령이 동행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걷는다면, 궁극적인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골로새서의 이 말씀을 깊이 붙잡고 묵상할 때, 성도의 삶은 비로소 죽은 물고기처럼 세파에 떠밀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 소망으로 가득 찬 역동적 삶이 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격려한다.

끝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성도가 바울처럼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역설 속에서 주어진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길 축원한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와 선교 현장을 섬기는 모든 수고가, 궁극적으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신비를 더 많은 영혼에게 전하는 일에 기여한다면, 그 어떠한 고난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쁨 안에 고난에 동참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섬기며, 영광을 바라보는” 장재형목사의 핵심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골로새서뿐 아니라 에베소서, 빌립보서, 로마서, 고린도후서 등 바울의 다른 서신을 통틀어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고, 장재형목사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거듭 역설해 주는 바울 신학의 정수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가 골로새서 1장 24절부터 29절까지라는 짧은 본문 안에서도,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마련하신 구원 계획과 복음의 비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채우는 교회의 사명, 마지막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을 이겨 내고 복음을 전하는 동력을 발견하게 된다면, 믿음의 생활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기억하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이 너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리라”고 거듭 강조함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야말로 성도로서 걸어가야 할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임을 확신에 찬 어조로 전한다. 바로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반복하고, 또 성도들에게 실제로 행하길 독려해 온 삶의 자세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교회 안팎에서 실천하고 체화해야 할 복음적 삶의 기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 장재형목사(장다윗)

장재형목사가 선포하는 성육신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복합적 예수상을 통해 지금의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네 복음서는 같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 다른 배경, 다른 시각, 다른 해석의 틀로 제시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자기 시대와 청중, 상황에 맞게 증언하면서도, 한 인물 안에 공존하는 여러 면모를 흥미롭게 기록한다. 초대 교회 이후 오랜 전통 속에서, 그리고 교부들과 중세시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을 복음서 해석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장식이 아니라, 각 복음서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그리고 있는가를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적 상징체계였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설립) 목사는 이러한 전통을 활용하면서, 네 복음서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좀 더 직관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그는 마태복음을 사자에, 마가복음을 송아지에, 누가복음을 사람에,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대응시키는 해석틀을 따른다. 사자라 함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징하고, 송아지는 종으로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 사람은 인자로서 인간의 약함과 고통을 직접 겪으시는 공감 능력을, 독수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초월적 신성을 대표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왕권을 강조한다.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오신 장면을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는 족보로 풀어내며, 다윗 왕조의 계승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예수를 드러낸다. 이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며, 유대 민족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증언한다. 따라서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사자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마가복음은 ‘곧’(εὐθὺς)이라는 부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급속한 사건 전개가 특징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때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일련의 행적이 빠른 호흡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장엄함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모든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종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송아지 혹은 황소로 상징되는 희생적 봉사의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며,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극단적 섬김의 태도와 어우러진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민을 향해 열린 구원의 문을 소개한다. 누가는 가난한 자, 이방인, 세리, 여인, 병자 등 소외된 이들에게 친히 다가가 돌보시는 예수님을 활발히 그려내는데, 이는 예수님이 특정 민족이나 특정 계층만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임을 드러낸다.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아픔을 함께 겪고,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에 공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누가복음은 사람이라는 상징과 맞물려 있다.

요한복음은 한층 더 높은 차원, 혹은 신적인 권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독수리’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소개한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장엄한 선언은, 이 복음서가 예수님을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선재하시는 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으로 부각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초월성을 매우 선명하게 제시하여,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 존재라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네 복음서가 갖는 이 상징적 해석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왕이자 종이시고, 인자이자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인간적인 약함을 체험하셨으나, 그 본질에서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우리가 한쪽 면에만 치우친 예수 이해를 넘어 전인격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현대 신앙인들도 왕이신 예수님 앞에 경외심을 갖는 동시에, 이웃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종의 모습, 죄인과 아픔을 함께 지시며 공감하시는 인자(사람)로서의 예수님, 그리고 하늘의 독수리처럼 위엄있게 내려오시는 신성을 가진 예수님을 고루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고스와 태초의 신비

네 복음서 중 특히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장엄한 구절로 시작한다.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라 불리는 “말씀” 개념을 끌어오는데, 이것이 유대인 독자뿐 아니라 헬라·로마 사상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도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 질서와 궁극적 진리를 관통하는 어떤 ‘불변의 원리’, ‘이성적 근거’를 로고스라 불러왔고, 스토아 철학이나 플라톤주의 전통에서도 로고스는 지극히 높은 지적 실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헬라 철학적 개념을 창조적 방식으로 전용(轉用)한다. 흔히 관념적·추상적 이치로만 여기던 로고스가 실제 인격적 존재이며, 그것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선언한다. 태초, 즉 창세기의 우주 창조 시점에서 이미 말씀이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파격적 메시지는 예수님이 단지 인간 스승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창조와 역사의 주인이심을 밝힌다.

이런 구절이 기록된 배경은, 복음서가 예루살렘이라는 한 지역적·종교적 중심지를 뛰어넘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나가던 상황이었다는 데 있다. 사도행전 이후로 복음이 점차 헬라·로마 세계로 전해졌고, 이질적인 문화와 철학적 전통 속에서 복음을 해명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적 율법이나 메시아 사상에 익숙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설명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그대들이 그토록 찾아왔던 보편적 진리, 즉 로고스가 사실은 인격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요한복음의 선포는 당대 지성인들에게 분명한 도전을 던졌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이 들려주는 이 “로고스 신비”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21세기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들, 철학자들, 예술가들, 지식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우주와 생명의 근원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궁극적 진리는 인격으로 존재하며,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로 현현했다. 지적인 모색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참 진리에 도달하려면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시는 ‘계시’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핵심 논리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으니”라고 말함으로써, 로고스와 창조의 관계를 못 박는다. 플라톤주의자나 스토아학파가 아무리 로고스를 숭상해도, 그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실제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한복음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자 하나님으로, 그리고 역사와 미래의 주관자로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으로 묘사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결국 이 로고스 사상은 고대 철학의 언어를 빌려 복음이 가진 우주적 스케일과 신비를 선포하는 매우 독특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초대 교회가 헬라-로마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보여준 놀라운 신학적 통찰”이라고 해설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유대적인 메시야 개념에만 가두지 않고, 보편적 인류의 구주로 증언하려는 시도가 담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은혜와 진리의 충만

성육신(Incarnation)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사건은,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초대 교회 당시부터 이단 논쟁이나 교리 논쟁의 초점이기도 했다. 특히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한 구절로 이 파격적 사건을 압축한다.

여기서 육신(sarx)은 헬라 사상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곤 했다. 물질은 영혼보다 열등하고, 신적 존재는 더 고결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사상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실제 ‘인간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추상적 개념”이나 “신화적 현신(顯身)”이 아니라, 역사적 구체성 속에서 이뤄진 사건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 갈릴리 나사렛 출신, 마리아의 아들로 자라나, 헬라어와 아람어, 히브리어가 혼재한 로마 치하 팔레스타인 땅에서 먹고 마시며 일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극단적 자기 비움(Kenosis)”이라 표현한다. 빌립보서 2장 6~8절이 말하듯,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신적인 영광에서 가장 비천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점이 성육신의 본질이다. 세상 종교와 신화에서 신이 인간처럼 변장하거나 임시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많지만, 그 신들이 인간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고, 또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일한 자리’에 서셨다는 의미이다. 갈증과 피로, 배고픔, 육체적 고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필연적 한계까지 예수님이 똑같이 감당하셨다. 이 사실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죄로 인해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다리를 하나님 편에서 놓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구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 하반절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은혜(헬라어 χάρις)는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며, 진리(ἀλήθεια)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실재, 즉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인간이 누구이기에 이런 은혜를 받고, 전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오직 성육신으로만 가능한 기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율법과 성육신을 대비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주고, 인간이 그 죄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율법 자체가 인류의 죄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죄를 깨닫게 만드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능력은 없다. 결국 인간은 율법 앞에서 모두가 죄인임을 자각할 뿐, 해결책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이때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새 아담’으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

성육신을 이해할 때, 단지 신학적 교리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2천 년 전 이루어진 독특한 종교 사건이라고 여긴다면, 그 내면의 역동성을 놓치게 된다. 성육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며,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마다 다시 갱신되는 현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성도들은 그분을 영접함으로 실존적 구원에 들어간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이야말로 기독교가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가장 핵심 동력 중 하나라고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는 대개 인간이 신을 찾아올라가는 구조였으나,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신 이야기, 즉 인카네이션을 근간으로 한다. 이 사랑과 겸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계획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울림을 준 것이다.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서 밝히는 구원의 빛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곧 성육신 사건이 왜 그렇게도 절실했을까. 그것은 인류가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어둠은 단지 빛이 없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면서 맞닥뜨리는 영적 파멸을 상징한다.

로마서 1장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고 온갖 더러운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발한다. 율법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의인도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바울의 표현처럼, 인류는 결국 죽음의 지배 아래 놓였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슬픈 이야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소식이 오기 전, 인류가 처한 비극과 절망을 먼저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얼마나 깊이 죄에 빠져 있었는지, 또 영생과 영광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고백도 너무 가볍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 단순한 종교 개혁이나 가르침의 수준을 넘어서는 근본적 사건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 운동가, 제의(祭儀) 체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근본적으로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지 못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당대의 정치 권력자인 헤롯은 그의 탄생 소식에 위협을 느끼며 잔혹한 유아 학살을 자행했다. 한편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다. 이런 대조적 장면들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과, 빛을 찾아 나서는 겸손한 이방인들의 순례를 함께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재차 강조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형식이나 윤리 규범을 바꾸는 것을 넘어서는, 근본적 내면의 혁신을 가리킨다.

이처럼 어둠에 묶여 있던 세상에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등장하는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은 복음의 본질을 집약한다. 죄인이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養子)가 되고, 다시는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이다.

어둠과 죽음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류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최종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은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된다. 구약의 모든 예언과 그림자가 이 사건을 향해 달려갔으며, 신약의 사도들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갔다.

성탄절의 신학적 의미와 구원의 희망

이제 우리는 그 구체적인 기념일, 즉 성탄절(크리스마스)의 의미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해마다 되새기는 것이 성탄절의 참된 기쁨이라고 말한다. 역사적·교회 전통에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된 경위는 학계에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시금 환기한다는 점이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여러 모습으로 소비한다. 화려한 장식과 음악, 선물과 파티, 연말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는 시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복음적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런 외형적 축제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의 의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성탄절은 역사와 신앙의 분기점이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시대와 오신 후 시대, 곧 BC와 AD가 나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인류사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즉 메시아 도래 이전에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하나님의 뜻을 비췄으나, 온전한 구원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사망을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 신약의 증언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깊은 감동을 준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잉태 소식을 전할 때부터 시작해, 요셉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갈등, 베들레헴까지의 여정, 그리고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 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귀한 왕의 탄생’과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폭정 속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 가야 했다. 영광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비천하고 위험이 도사린 환경이 예수님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 아기 예수께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물을 바치고 경배한 사건은, 이분이 비단 유대 민족만의 구주가 아니라 온 세계를 향한 구주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목자들의 경배 이야기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높은 사람들, 힘 있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들판에서 밤을 세우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 소식은 세상적 서열과 위계를 파괴하는 하나님 나라의 섭리를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성탄절을 맞이하며, 현대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성육신의 현실성”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의 탄생은 2천 년 전 일어난 고대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에 들어와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돌아올 때마다, “아, 그렇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니 축하해야지”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성육신의 혁명적 메시지를 반의 반도 채 누리지 못한다.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었다는 데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 그리고 희생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자리, 고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아픔의 자리를 결코 형식적으로만 겪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당하셨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대제사장으로서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셨다(히브리서 4장 15~16절).

성육신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죽음, 부활, 승천, 재림까지 이어지는 대서사를 하나의 통합적 ‘구원 드라마’라고 부른다. 성탄절은 이 거대한 드라마의 서막 혹은 1막에 해당한다. 그 결말은 부활이고, 더 나아가 재림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다. 그런데 그 시작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단지 성인군자나 존경받을 만한 교사가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종교적 감동을 넘어, 존재론적 충격이다.

이로써 성탄절에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이 함축하는 모든 결과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죽음의 사슬에 영원히 갇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인류 역사는 BC와 AD로 구분되는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무기력하고 방황하는 우리 삶에 참된 의미와 방향성이 부여된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은 성탄절을 단지 한 해의 끝자락에 열리는 축제로 소비하기보다, 이 깊은 진리를 자기 인생과 공동체 안에 적용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성탄의 기쁨은 결국 “나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겠다”는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 부와 권력, 세상의 영화로 치장된 장식물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과 섬김의 길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육신에 참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결론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성육신의 메시지는 결국 네 복음서가 펼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층적 면모와,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신학을 통해 예수님의 우주적·선재적 신비를 드러내고, 이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성육신 진리를 심층적으로 풀어낸다. 이 성육신 사건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어둠과 죄,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인 인류를 비극으로부터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낮은 자리로 스스로 내려오심으로 완성됐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동방박사와 목자들에게 경배를 받으신 아기 예수님,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은, 성육신 신비의 총체이자 기독교 구원의 중심축이다.

성탄절이라는 한 시점에 우리는 그분의 탄생을 기념한다. 하지만 이 기억은 단지 과거 사건을 축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빛을 비추신다. 전 세계 교회가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즐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라는 임마누엘(Emmanuel) 신앙을 다시 확인하는 데 있다.

복음서별로 예수님을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에 비유하는 상징은 그분의 다양한 정체성을 조망하는 훌륭한 길잡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며, 종으로 섬기신 예수님은 죄인을 향한 헌신과 희생의 모델이 되신다. 인자 예수님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과 동행하시는 인류 보편의 구세주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독수리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적 권능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현대인들에게, 성탄절과 복음서 메시지를 좀 더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이 단순한 교회 전통과 연례 행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실은 우리가 매일같이 성육신 신앙을 붙들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섬기고 용납하며, 세상 속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낼 힘이 샘솟는다.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듯, 우리도 세상의 고통 현장에 들어가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을 흠모하며 따르는 것이 성육신 영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육신은 신앙인에게 매 순간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 사건이다. 2천 년 전 베들레헴 구유에 누이셨던 아기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의 심령 안에 다시금 탄생하여 빛과 진리를 펼치도록 허락하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의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성탄의 신학적 의미”가 삶 속에서 구현되는 구원의 희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이 위대한 선언이, 각자의 일상에서 다시 살아 움직일 때, 성육신은 과거 사건을 넘어 생생한 현재적 구원으로서 빛을 발한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도 성육신을 비롯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 재림에 이르는 전체 구원 계획을 깊이 묵상할 것을 권면한다. 신앙은 한두 번의 축제나 절기 행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육신의 의미를 해마다, 아니 매순간 곱씹고, 그 진리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 변화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성육신을 토대로 한 복음 이해는,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조명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하셨으며, 곧 하나님이셨다는 신앙고백이 우리 안에 선포될 때, 우리는 종교적 의무감을 넘어 기쁨과 자유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어둠과 죽음에서 해방되어 빛과 생명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성탄이 주는 궁극적 희망이며, 이 복음이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보여준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 안에 담긴 은혜와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품게 된다. 인간의 이성적 한계를 뛰어넘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죄와 사망에 빠진 인류를 향한 거룩한 구출 작전이, 태초부터 준비되고 이제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로 완성되어가고 있다.

이 메시지를 붙들고 성탄절을 맞이한다면, 단순히 추운 겨울날의 반짝이는 장식과 산타클로스, 선물을 교환하는 행사 이상의 뜨거운 감격을 맛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이 새롭게 빛날 때, 우리는 그 은혜의 빛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섬기게 된다. 성육신은 역사적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눈앞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신비다.
장재형목사의 성육신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왕적·종적·인적·신적 면모를 하나의 종합적 서사로 엮고, 요한복음 1장이 보여주는 로고스 개념을 통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임마누엘)’ 하나님이심을 각인한다. 죄와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리고 그 빛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열리는 새로운 길(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은 성탄절마다 다시 확증되는 위대한 선물이다.

이 모든 내용을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은 살아 있고 진행 중임을 알리는 고귀한 증표다. 네 복음서의 상징(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여러 각도에서 묵상하게 하며, 로고스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요한복음의 선언은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교사 정도가 아니라, 곧 태초부터 함께하신 하나님이심을 웅변한다.

이 성육신은 인간이 결코 갈 수 없었던 ‘하늘로부터의 길’을 열어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되었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베푸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회개와 감사로 나아가며,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고, 사랑과 섬김의 행위로 그분의 뜻에 동참한다. 그러므로 매해 돌아오는 성탄절은 과거를 기념하는 의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신앙의 근본을 다시 확인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은, 이처럼 성육신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이 단지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마 제국과 그레꼬-로마 철학권, 북아프리카, 오늘날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유럽 전역에까지 복음이 뻗어나간 것은, 이 진리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의 심령을 울리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우리는 그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이란 곧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광채다.

그 광채를 외면하느냐,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은 결정적으로 갈린다.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신적 생명에 참여하는 권능을 얻게 된다. 이것이 어둠과 죽음의 세계를 밝히는 구원의 빛이다. 성육신은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탄절은 그러한 사건을 매년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이다.

네 복음서의 이미지가 제각기 다른 색채로 예수님을 그려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심장부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공통된 메시지가 맥동하고 있다. 이것은 교리나 예식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해석할 수 없는,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구원의 행위다. 21세기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내면의 공허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의 말에 따르면, 성육신은 결코 한 번 읽고 넘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 생애에 걸쳐 묵상해야 할 보물창고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 빛을 얻게 되는 샘물이다. 성탄절을 통해, 그리고 네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도, 종으로도, 사람으로도, 신으로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복음 이해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이 곧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 시나리오가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이어진다는 대서사의 정점 중 하나이고, 성탄절은 그 현현(顯現)의 문턱에서 모두를 초대하는 특별한 축제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는 어둠을 밝히는 하늘의 빛, 만왕의 왕이자 종으로 임하신 주, 모든 인류의 인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동시에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이 “성육신의 경이로움”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성탄절은 온전한 의미를 발한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가 선포하는 성육신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복합적 예수상을 통해 지금의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이제 너희는 그 빛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 이것이 성탄의 본질적 메시지이자, 모든 시공을 초월해 우리를 향해 계속 울려 퍼지는 복음의 초청이다. 그리고 그 초청에 응답하는 삶이야말로, 성육신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서 꽃피우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BLOGFLARE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지역 라디오 방송국 연례 모금 행사 참여

올리벳대학교

한인 신학자인 장재형목사(영어명: 장다윗, 데이비드 장)가 설립한 올리벳대학교의 대표자들과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최근 캘리포니아 안자(Anza) 지역 방송국 KOYT 97.1 FM이 주최한 연례 모금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행사 주제와 주요 활동

이번 행사는 ‘버블 & BBQ’를 주제로 열렸으며, 지역 주민들이 다수 참여해 활기를 더했습니다. KOYT 라디오 방송국의 프로그램 디렉터 에린 로스코(Erinne Roscoe)가 행사의 진행을 맡았으며, 라이브 음악 공연, 침묵 경매, 경품 추첨, 그리고 Island Fusion BBQ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참석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지역사회와의 교류

올리벳대학교 측은 “이번 행사를 통해 지역의 주요 인사들, 커뮤니티 리더들, 안자 지역의 오랜 거주민과 새로 이사 온 주민들, 그리고 농업 분야 협력 가능성을 지닌 파트너들과 교류할 수 있어 뜻깊었다”고 밝혔습니다.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과거 올리벳대학교에서 열린 투어와 오픈 하우스 등 다양한 행사를 떠올리며 긍정적인 평가를 나눴습니다. 또한 올리벳대학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교직원들을 지역사회에 소개하며, 안자 지역의 새로운 이웃으로서 주민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했습니다.

지속적인 협력과 우정

올리벳대학교는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행사 참여를 통해 형성된 소중한 관계들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도 안자 지역사회와 더욱 깊고 풍성한 협력과 교류를 이어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올리벳대학교의 역사와 비전

한편 올리벳대학교는 장재형 목사가 설립한 올리벳신학교(Olivet Theological College and Seminary)에서 시작하여 2004년 3월 3일 미국 정부에 정식 등록되었습니다.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국 교육 평가 순위에서도 상위권에 자리잡았으며, 현재 조나단 박 박사가 제6대 총장으로 학교를 이끌고 있습니다.

BLOGF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