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찢고 나온 셋집의 빛: 쇠사슬도 막지 못한 ‘거침없는’ 복음의 지리학,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는 1627년에 그려진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 in Prison)>이라는 작은 명화가 있습니다. 그림 속 바울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위풍당당한 영웅의 자태가 아닙니다. 차가운 감옥 한구석, 깊게 파인 주름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노사도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펜 끝과 무릎 위에 놓인 양피지 위로는 어둠을 가르는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내립니다. 발목을 옥죄는 무거운 쇠사슬조차 그가 써 내려가는 진리의 문장들을 막아설 수는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갇힘 속에서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드높이 비상했던 이 역설의 풍경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이 품고 있는 위대한 침묵과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풍랑과 파선을 뚫고 마침내 도착한 사도행전 28장의 풍경은 화려한 승전보가 아닌 묵직한 고요함으로 시작됩니다. 이 잔잔한 본문의 심연을 길어 올린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가 싹을 틔우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 어떻게 거대한 선교의 무대가 되는지를 예리한 신학적 통찰로 조명합니다.

멜리데의 모닥불, 일상으로 스며든 은혜의 온도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신 약속대로 276명의 생명이 무사히 멜리데 섬에 상륙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이들을 맞이한 것은 이방인들이 피워낸 따뜻한 모닥불 하나였습니다. 성경은 이 극적인 생존의 순간을 요란한 기적의 언어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담백한 기록 속에 담긴 환대의 행위를 가리켜 “은혜의 가장 일상적인 얼굴”이라고 명명합니다. 낯선 이를 향해 내어준 불씨 하나,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소박한 손길이 곧 복음이 들어가는 굳건한 문이 되었습니다. 거창한 구호나 웅장한 이벤트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역 사회 안에서 회복해야 할 선한 영향력 역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묵묵히 나누는 작은 친절과 손 대접에 있음을 깊은 성경 묵상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독사와 치유, 소란을 잠재우는 십자가의 고요함

불가에서 벌어진 독사 사건은 인간의 얄팍한 신앙심이 얼마나 쉽게 요동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뱀에 물린 바울을 보고 단숨에 천벌을 받은 살인자로 정죄했다가, 그가 죽지 않자 이내 신으로 떠받듭니다. 눈앞에 벌어진 자극적인 현상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벼운 숭배거리로 전락시키는 피상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이 급격한 여론의 쏠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울의 중심에 주목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신격화를 철저히 경계하며,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고칠 때에도 그저 조용히 방에 들어가 손을 얹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 자체가 맹목적인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참된 권능은 소란을 피우며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영광만을 오롯이 남깁니다.

압비오 광장의 마중, 무너진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연대

로마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의 막바지,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사도를 맞으러 먼 길을 달려온 무명의 로마 성도들의 모습은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줍니다. 수많은 고난과 배척에 지쳐있던 노년의 사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형제들의 환대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하고 깊은 담대함을 얻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진짜 굳센 용기는 개인의 홀로 선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치열한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 선 지도자조차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위대한 비전보다 아름다운 것은, 지친 어깨를 내어주고 함께 걸어주는 공동체의 따뜻한 연대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당 입구에서 나누는 다정한 인사와 식탁의 교제가 결코 가벼운 친교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영적 생태계에 있습니다.

로마의 셋집, 쇠사슬을 뛰어넘는 창조적 상상력

마침내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 도착한 바울에게 주어 진 것은 온전한 자유가 아닌, 군사의 감시를 받는 작은 ‘셋집’이었습니다. 활동 반경이 철저히 제한된 갇힌 공간이었지만, 장재형 목사는 이 초라한 셋집을 쇠사슬을 뛰어넘는 ‘복음의 사회적 상상력’이 발현된 영광스러운 자리로 해석합니다. 감시의 눈초리는 진리가 뻗어나가는 길을 막지 못했고, 사도의 몸을 묶은 사슬은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는 사랑의 손길을 묶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척박한 제약이 창조적인 사역의 벽돌이 되어, 주인과 노예라는 거대한 사회적 장벽을 허물고 오네시모와 같은 영혼들을 형제로 빚어냈습니다. 우리의 현실 역시 팍팍한 재정과 불리한 조건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지만, 생명력 넘치는 말씀은 언제나 그 닫힌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닫힌 결말이 아니라, “금하는 사람이 없이 거침없이(ἀκωλύτως)”라는 선언과 함께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끝을 맺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가슴 벅찬 열린 결말이 곧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맡겨진 빈 페이지라고 역설합니다. 시대의 바람이 차갑게 변하고 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매서워졌을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고요한 맥박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이제 렘브란트의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와, 사도행전의 29장을 우리의 삶으로 써 내려갈 차례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작고 초라한 셋집이 누군가를 품어내는 다정한 환대의 공간이 될 때, 그리고 무너진 이웃의 상처 위에 조용히 기도의 두 손을 포갤 때, 2천 년 전 바울이 거침없이 흘려보냈던 그 은혜의 강물은 2026년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 다시금 힘차게 굽이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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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혹독한 인생의 겨울, 당신의 성전에는 ‘따뜻한 겉옷’이 준비되었는가,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입니다. 계절의 순환에 따른 겨울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에도 예고 없이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곤 합니다. 경제적 결핍, 관계의 단절, 혹은 질병이라는 이름의 눈보라가 몰아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할 곳을 찾습니다. 2천 년 전, 로마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노사도 바울 역시 다가오는 겨울의 냉기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올 때에 겉옷을 가지고 오고.” 죽음을 목전에 둔 위대한 전도자가 구한 것은 거창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시린 몸을 덮을 낡은 겉옷 한 벌과 사람의 온기였습니다.

폭풍우 치는 밤, 영혼이 깃들 유일한 피난처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는 성전(聖殿)의 본질을 꿰뚫는 명장면이 등장합니다. 19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왔으나,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장발장. 그가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미리엘 주교의 사택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문이 닫혔을 때, 주교는 그를 맞아들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은 나의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집입니다. 이 문은 들어오는 사람에게 이름을 묻지 않고, 오직 그에게 아픔이 있는지를 물을 뿐입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장재형 목사가 전한 역대하 7장과 스가랴 14장의 설교 메시지와 깊게 공명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전을 단순히 건물의 개념으로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벧엘의 광야처럼, ‘하늘과 땅이 만나고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거룩한 자리’가 바로 성전임을 신학적 통찰로 풀어냈습니다.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환난이라는 폭풍우 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전이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닌, 영혼의 유일한 피난처임을 역설합니다.

세상이 펜데믹과 경제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휘청거릴 때,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은 무엇일까요? 장재형 목사는 환난의 때일수록 성전의 본질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내어준 것이 단순한 잠자리와 음식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이었던 것처럼,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 입고 밀려난 이들이 들어와 하나님을 대면하고 치유받는 영적 요새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고통받는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르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감옥 바닥을 녹이는 화해의 온기

그러나 성전의 기능은 피난처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후서 4장의 말씀을 통해, 성전 안을 채워야 할 진정한 온기는 ‘사랑과 화해’임을 묵직하게 전합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말한 대목은 실로 놀라운 반전입니다. 마가는 과거 전도 여행 도중 힘들다는 이유로 무단이탈하여 바울에게 큰 실망을 안겼던 인물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동역자 바나바와 결별하는 아픔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겨울 앞에서, 바울은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나의 일에 유익한 자”로 인정하며 초청합니다.

이 극적인 화해야말로 복음이 가진 위대한 능력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요청한 ‘겉옷’이 육체의 추위를 막는 도구였다면, 마가를 부른 것은 영혼의 추위를 녹이는 사랑의 행위였음을 통찰합니다. 빌레몬에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게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 묵상을 통해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무리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예식이 있어도, 그 안에 용서와 화해, 그리고 형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그곳은 냉기 가득한 돌무더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기는 힘은 시스템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겉옷에서 나옵니다.

기도의 무릎으로 마중 나가는 영적인 봄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전쟁과 기근, 갈등과 분열의 소식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겨울밤을 지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가랴의 예언처럼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시며, 우리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그 길은 열린다고 확신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환난의 시간 동안 무엇을 준비하느냐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지금 따뜻합니까? 혹시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정죄로 인해 냉골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화해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마가(Mark)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오네시모가 되어줄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는 참된 성전으로 완성됩니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은혜 안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웠습니다. 그는 다가올 죽음이라는 겨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상황이 어렵고 현실이 춥더라도, 사랑의 겉옷을 챙겨 입고 기도의 불을 지피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와 사랑 위에 반드시 응답하시며, 마침내 우리 삶에 찬란한 영적 봄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관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로이자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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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장 해설 – 장재형목사

장다윗(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의 설교가 지니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단순한 지식의 집합으로 소비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체온과 공동체의 호흡을 현재의 교회 안으로 되살린다는 데 있다.

그의 고린도전서 16장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흔히 “마지막 장”이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 왔던 본문이 사실은 교회의 정체성과 실천을 가늠하는 핵심 장면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방언과 예언의 질서, 부활이라는 거대한 신앙 고백을 지나, 재정 후원과 이동 계획, 사람들의 이름과 인사로 마무리되는 서신의 결말은 결코 우연적 배치가 아니다. 이는 복음이 추상적 개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일정, 신뢰와 물질, 존중과 눈물이 얽힌 현실의 언어로 구현되어야 함을 선포하는 선언에 가깝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고린도전서 16장을 ‘신앙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현장’으로 읽도록 이끈다. 교리가 분명하다면 반드시 책임 있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고, 실천이 살아 있다면 진리의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통합적 원리가 이 마지막 장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의 서두를 여는 주제는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다. 여기서 연보는 즉흥적인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조직된 사랑의 리듬을 뜻한다. 바울이 요청한 것은 일회성 헌금이 아니라 지속적 책임이었다. 헬라어 표현이 암시하듯, 이는 충동적 시혜가 아니라 계획된 모금이며 공동체적 참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들과 동일한 원칙 아래, 매주 첫날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미리 준비하도록 안내한다. 이 지침에는 섬세한 목회적 통찰이 담겨 있다. 첫째, 갑작스러운 부담을 제거한다. 바울이 도착한 후 분위기에 휩쓸려 모금하는 방식은 감정을 소진시키고 공동체를 불필요한 압박에 빠뜨릴 수 있다. 둘째, 선한 습관을 형성한다.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반복된 훈련을 통해 성품으로 자리 잡는다. 셋째, 형편에 따른 참여라는 공정성이 있다. 동일한 액수를 강요하지 않되, 모두가 참여함으로써 한 몸의 책임을 나누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교회의 재정이 단순한 운영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를 성숙하게 하는 실천 신학의 장이라고 강조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은 신약 전반에 흩어진 기록을 통해 실제적 상황이었음이 확인된다. 초대교회는 이상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기근과 가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던 현실의 공동체였다. 그렇기에 바울이 놓은 연대의 다리는 더욱 의미가 선명해진다.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을 돕는 행위는 도덕적 우월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교회가 서로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는 행위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영적 빚’은 죄책이 아니라 감사로 표현되는 연대의 윤리다. 장재형목사의 해설은 이 연대를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추상적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눈물이 고린도의 지갑을 흔들고, 고린도의 풍요가 예루살렘의 생명을 잇는 끈이 된다. 교회는 이렇게 서로의 결핍을 통해 서로를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이 본문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하면, 연보는 단순히 구제 헌금 항목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교회가 물질을 어떻게 다루는지, 곧 청지기 정신과 투명성, 사랑의 동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바울의 연보 처리 방식은 매우 신중하다. 그는 헌금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공동체가 인정한 이들을 세워 편지와 함께 파송한다. 필요하다면 자신도 동행할 수 있음을 말하지만, 그 역시 공동체적 절차 안에 둔다. 이는 재정이 영적 권위라는 명목으로 사유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강력한 장치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현대 교회가 재정을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하며, 어떤 방식으로 신뢰를 쌓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헌금의 액수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랑과 진실의 질서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재정은 교회의 혈류와 같다. 흐름이 막히면 공동체 전체가 병들 수 있다. 유다의 비극이 상징하듯, 돈은 숫자를 넘어 인격을 드러내는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의 조심스러운 절차는 재정을 선교의 연료이자 거룩의 훈련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개념은 정통, 곧 오소독스의 감각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정통은 박물관에 전시된 교리가 아니라 삶을 살리는 진리의 좌표다. 교리가 분명할수록 사랑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반대로 사랑의 실천이 사라지면 교리는 공허한 문장으로 굳어진다. 고린도전서 16장은 이 두 축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현실적인 신학 텍스트다. 바울은 부활을 선포한 직후 연보를 말한다. 이는 부활 신앙이 내세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사랑을 실행할 이유임을 드러낸다. 부활은 미래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윤리다. 장재형목사는 이 연결을 통해 교회가 신학적 깊이를 추구하는 만큼 사회적 책임과 구체적 돌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후 바울은 연보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선교 여정을 공유한다.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향하려는 계획, 겨울을 보낼 가능성,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 그리고 “큰 문이 열렸으나 대적도 많다”는 고백은 사역이 낭만이 아니라 현실의 전투임을 보여 준다. 선교는 영감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머물 때와 떠날 때, 열리는 때와 닫히는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계획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의 표현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 운영의 균형 감각을 읽어 낸다. 열정만 남으면 쉽게 소진되고, 구조만 남으면 생명력이 사라진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신뢰하면서도 구체적인 일정과 가능성을 명확히 한다. 이는 오늘의 교회가 영적인 언어로 현실을 덮어 버리는 태도를 경계하게 만든다.

고린도전서 16장에는 유난히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디모데, 아볼로, 스데바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편지의 끝을 채운다. 이는 교회가 제도 이전에 관계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가 두려움 없이 사역하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세대 교체가 늘 긴장과 오해를 동반한다는 현실을 전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교회가 다음 세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한 사람의 사명이 공동체의 언어와 태도에 의해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묻는다. 존중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사역 생태계를 지탱하는 영적 기반이다. 또한 아볼로에 대한 언급은 특정 인물 의존의 위험을 성찰하게 한다. 교회가 원한다고 해서 사역자가 항상 즉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스데바나의 집에 대한 언급은 가정교회의 생생한 흔적을 보여 준다. 예배당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 한 가정의 헌신은 곧 교회의 공간이자 환대의 문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기기로 결단했다고 말하며, 그런 이들에게 순복하고 존중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섬김이 단순한 봉사를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영적 직분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오늘의 가정과 일상으로 확장한다. 교회는 주일 예배당 안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식탁과 거실, 직장과 거리에서 관계의 방식으로 구현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된다.

편지의 마지막 권면은 간결하면서도 단단하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강건하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요청이다. 강건함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강건함이 사랑을 잃으면 폭력이 되고, 사랑이 강건함을 잃으면 감상으로 흐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교회의 윤리적 나침반으로 제시한다. 깨어 있음은 내적 경건을 넘어 현실의 문제 앞에서 책임 있게 대응하는 태도다. 사랑으로 행하라는 명령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과 배분, 의사결정의 동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은 교회의 운영 지침처럼 보이면서도, 그 깊은 층위에서는 교회의 영혼을 다루는 본문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이 장에서 길어 올리는 핵심은 분명하다. 교회는 사랑을 말로 증명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랑을 실행하고 지속함으로써 복음이 현실에서 작동함을 보여 준다. 연보는 공동체적 책임으로, 재정의 투명성은 신뢰의 구조로, 사람에 대한 존중은 미래를 살리는 배려로 나타난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명령은 신앙을 삶의 문법으로 번역하는 열쇠다. 그리고 마라나타의 소망은 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늦추지 않도록 붙드는 마지막 긴장이다. 이 본문은 오늘의 교회가 어디서 무너지고, 어디서 다시 세워져야 하는지를 묻는 깊은 영적 점검표가 된다. 사랑이 살아 있는 교회만이 진리를 진리답게 지키고, 사람을 사람답게 존중하며, 세상을 향해 복음을 복음답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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