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목사가 선포하는 성육신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복합적 예수상을 통해 지금의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네 복음서는 같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 다른 배경, 다른 시각, 다른 해석의 틀로 제시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자기 시대와 청중, 상황에 맞게 증언하면서도, 한 인물 안에 공존하는 여러 면모를 흥미롭게 기록한다. 초대 교회 이후 오랜 전통 속에서, 그리고 교부들과 중세시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을 복음서 해석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장식이 아니라, 각 복음서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그리고 있는가를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적 상징체계였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설립) 목사는 이러한 전통을 활용하면서, 네 복음서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좀 더 직관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그는 마태복음을 사자에, 마가복음을 송아지에, 누가복음을 사람에,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대응시키는 해석틀을 따른다. 사자라 함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징하고, 송아지는 종으로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 사람은 인자로서 인간의 약함과 고통을 직접 겪으시는 공감 능력을, 독수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초월적 신성을 대표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왕권을 강조한다.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오신 장면을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는 족보로 풀어내며, 다윗 왕조의 계승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예수를 드러낸다. 이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며, 유대 민족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증언한다. 따라서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사자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마가복음은 ‘곧’(εὐθὺς)이라는 부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급속한 사건 전개가 특징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때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일련의 행적이 빠른 호흡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장엄함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모든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종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송아지 혹은 황소로 상징되는 희생적 봉사의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며,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극단적 섬김의 태도와 어우러진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민을 향해 열린 구원의 문을 소개한다. 누가는 가난한 자, 이방인, 세리, 여인, 병자 등 소외된 이들에게 친히 다가가 돌보시는 예수님을 활발히 그려내는데, 이는 예수님이 특정 민족이나 특정 계층만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임을 드러낸다.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아픔을 함께 겪고,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에 공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누가복음은 사람이라는 상징과 맞물려 있다.
요한복음은 한층 더 높은 차원, 혹은 신적인 권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독수리’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소개한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장엄한 선언은, 이 복음서가 예수님을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선재하시는 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으로 부각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초월성을 매우 선명하게 제시하여,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 존재라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네 복음서가 갖는 이 상징적 해석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왕이자 종이시고, 인자이자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인간적인 약함을 체험하셨으나, 그 본질에서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우리가 한쪽 면에만 치우친 예수 이해를 넘어 전인격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현대 신앙인들도 왕이신 예수님 앞에 경외심을 갖는 동시에, 이웃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종의 모습, 죄인과 아픔을 함께 지시며 공감하시는 인자(사람)로서의 예수님, 그리고 하늘의 독수리처럼 위엄있게 내려오시는 신성을 가진 예수님을 고루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고스와 태초의 신비
네 복음서 중 특히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장엄한 구절로 시작한다.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라 불리는 “말씀” 개념을 끌어오는데, 이것이 유대인 독자뿐 아니라 헬라·로마 사상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도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 질서와 궁극적 진리를 관통하는 어떤 ‘불변의 원리’, ‘이성적 근거’를 로고스라 불러왔고, 스토아 철학이나 플라톤주의 전통에서도 로고스는 지극히 높은 지적 실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헬라 철학적 개념을 창조적 방식으로 전용(轉用)한다. 흔히 관념적·추상적 이치로만 여기던 로고스가 실제 인격적 존재이며, 그것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선언한다. 태초, 즉 창세기의 우주 창조 시점에서 이미 말씀이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파격적 메시지는 예수님이 단지 인간 스승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창조와 역사의 주인이심을 밝힌다.
이런 구절이 기록된 배경은, 복음서가 예루살렘이라는 한 지역적·종교적 중심지를 뛰어넘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나가던 상황이었다는 데 있다. 사도행전 이후로 복음이 점차 헬라·로마 세계로 전해졌고, 이질적인 문화와 철학적 전통 속에서 복음을 해명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적 율법이나 메시아 사상에 익숙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설명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그대들이 그토록 찾아왔던 보편적 진리, 즉 로고스가 사실은 인격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요한복음의 선포는 당대 지성인들에게 분명한 도전을 던졌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이 들려주는 이 “로고스 신비”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21세기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들, 철학자들, 예술가들, 지식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우주와 생명의 근원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궁극적 진리는 인격으로 존재하며,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로 현현했다. 지적인 모색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참 진리에 도달하려면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시는 ‘계시’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핵심 논리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으니”라고 말함으로써, 로고스와 창조의 관계를 못 박는다. 플라톤주의자나 스토아학파가 아무리 로고스를 숭상해도, 그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실제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한복음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자 하나님으로, 그리고 역사와 미래의 주관자로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으로 묘사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결국 이 로고스 사상은 고대 철학의 언어를 빌려 복음이 가진 우주적 스케일과 신비를 선포하는 매우 독특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초대 교회가 헬라-로마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보여준 놀라운 신학적 통찰”이라고 해설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유대적인 메시야 개념에만 가두지 않고, 보편적 인류의 구주로 증언하려는 시도가 담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은혜와 진리의 충만
성육신(Incarnation)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사건은,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초대 교회 당시부터 이단 논쟁이나 교리 논쟁의 초점이기도 했다. 특히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한 구절로 이 파격적 사건을 압축한다.
여기서 육신(sarx)은 헬라 사상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곤 했다. 물질은 영혼보다 열등하고, 신적 존재는 더 고결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사상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실제 ‘인간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추상적 개념”이나 “신화적 현신(顯身)”이 아니라, 역사적 구체성 속에서 이뤄진 사건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 갈릴리 나사렛 출신, 마리아의 아들로 자라나, 헬라어와 아람어, 히브리어가 혼재한 로마 치하 팔레스타인 땅에서 먹고 마시며 일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극단적 자기 비움(Kenosis)”이라 표현한다. 빌립보서 2장 6~8절이 말하듯,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신적인 영광에서 가장 비천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점이 성육신의 본질이다. 세상 종교와 신화에서 신이 인간처럼 변장하거나 임시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많지만, 그 신들이 인간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고, 또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일한 자리’에 서셨다는 의미이다. 갈증과 피로, 배고픔, 육체적 고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필연적 한계까지 예수님이 똑같이 감당하셨다. 이 사실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죄로 인해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다리를 하나님 편에서 놓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구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 하반절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은혜(헬라어 χάρις)는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며, 진리(ἀλήθεια)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실재, 즉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인간이 누구이기에 이런 은혜를 받고, 전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오직 성육신으로만 가능한 기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율법과 성육신을 대비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주고, 인간이 그 죄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율법 자체가 인류의 죄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죄를 깨닫게 만드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능력은 없다. 결국 인간은 율법 앞에서 모두가 죄인임을 자각할 뿐, 해결책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이때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새 아담’으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
성육신을 이해할 때, 단지 신학적 교리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2천 년 전 이루어진 독특한 종교 사건이라고 여긴다면, 그 내면의 역동성을 놓치게 된다. 성육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며,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마다 다시 갱신되는 현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성도들은 그분을 영접함으로 실존적 구원에 들어간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이야말로 기독교가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가장 핵심 동력 중 하나라고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는 대개 인간이 신을 찾아올라가는 구조였으나,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신 이야기, 즉 인카네이션을 근간으로 한다. 이 사랑과 겸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계획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울림을 준 것이다.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서 밝히는 구원의 빛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곧 성육신 사건이 왜 그렇게도 절실했을까. 그것은 인류가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어둠은 단지 빛이 없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면서 맞닥뜨리는 영적 파멸을 상징한다.
로마서 1장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고 온갖 더러운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발한다. 율법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의인도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바울의 표현처럼, 인류는 결국 죽음의 지배 아래 놓였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슬픈 이야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소식이 오기 전, 인류가 처한 비극과 절망을 먼저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얼마나 깊이 죄에 빠져 있었는지, 또 영생과 영광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고백도 너무 가볍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 단순한 종교 개혁이나 가르침의 수준을 넘어서는 근본적 사건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 운동가, 제의(祭儀) 체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근본적으로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지 못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당대의 정치 권력자인 헤롯은 그의 탄생 소식에 위협을 느끼며 잔혹한 유아 학살을 자행했다. 한편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다. 이런 대조적 장면들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과, 빛을 찾아 나서는 겸손한 이방인들의 순례를 함께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재차 강조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형식이나 윤리 규범을 바꾸는 것을 넘어서는, 근본적 내면의 혁신을 가리킨다.
이처럼 어둠에 묶여 있던 세상에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등장하는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은 복음의 본질을 집약한다. 죄인이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養子)가 되고, 다시는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이다.
어둠과 죽음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류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최종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은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된다. 구약의 모든 예언과 그림자가 이 사건을 향해 달려갔으며, 신약의 사도들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갔다.
성탄절의 신학적 의미와 구원의 희망
이제 우리는 그 구체적인 기념일, 즉 성탄절(크리스마스)의 의미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해마다 되새기는 것이 성탄절의 참된 기쁨이라고 말한다. 역사적·교회 전통에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된 경위는 학계에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시금 환기한다는 점이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여러 모습으로 소비한다. 화려한 장식과 음악, 선물과 파티, 연말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는 시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복음적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런 외형적 축제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의 의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성탄절은 역사와 신앙의 분기점이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시대와 오신 후 시대, 곧 BC와 AD가 나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인류사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즉 메시아 도래 이전에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하나님의 뜻을 비췄으나, 온전한 구원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사망을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 신약의 증언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깊은 감동을 준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잉태 소식을 전할 때부터 시작해, 요셉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갈등, 베들레헴까지의 여정, 그리고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 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귀한 왕의 탄생’과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폭정 속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 가야 했다. 영광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비천하고 위험이 도사린 환경이 예수님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 아기 예수께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물을 바치고 경배한 사건은, 이분이 비단 유대 민족만의 구주가 아니라 온 세계를 향한 구주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목자들의 경배 이야기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높은 사람들, 힘 있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들판에서 밤을 세우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 소식은 세상적 서열과 위계를 파괴하는 하나님 나라의 섭리를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성탄절을 맞이하며, 현대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성육신의 현실성”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의 탄생은 2천 년 전 일어난 고대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에 들어와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돌아올 때마다, “아, 그렇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니 축하해야지”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성육신의 혁명적 메시지를 반의 반도 채 누리지 못한다.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었다는 데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 그리고 희생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자리, 고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아픔의 자리를 결코 형식적으로만 겪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당하셨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대제사장으로서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셨다(히브리서 4장 15~16절).
성육신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죽음, 부활, 승천, 재림까지 이어지는 대서사를 하나의 통합적 ‘구원 드라마’라고 부른다. 성탄절은 이 거대한 드라마의 서막 혹은 1막에 해당한다. 그 결말은 부활이고, 더 나아가 재림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다. 그런데 그 시작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단지 성인군자나 존경받을 만한 교사가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종교적 감동을 넘어, 존재론적 충격이다.
이로써 성탄절에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이 함축하는 모든 결과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죽음의 사슬에 영원히 갇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인류 역사는 BC와 AD로 구분되는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무기력하고 방황하는 우리 삶에 참된 의미와 방향성이 부여된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은 성탄절을 단지 한 해의 끝자락에 열리는 축제로 소비하기보다, 이 깊은 진리를 자기 인생과 공동체 안에 적용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성탄의 기쁨은 결국 “나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겠다”는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 부와 권력, 세상의 영화로 치장된 장식물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과 섬김의 길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육신에 참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결론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성육신의 메시지는 결국 네 복음서가 펼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층적 면모와,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신학을 통해 예수님의 우주적·선재적 신비를 드러내고, 이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성육신 진리를 심층적으로 풀어낸다. 이 성육신 사건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어둠과 죄,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인 인류를 비극으로부터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낮은 자리로 스스로 내려오심으로 완성됐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동방박사와 목자들에게 경배를 받으신 아기 예수님,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은, 성육신 신비의 총체이자 기독교 구원의 중심축이다.
성탄절이라는 한 시점에 우리는 그분의 탄생을 기념한다. 하지만 이 기억은 단지 과거 사건을 축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빛을 비추신다. 전 세계 교회가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즐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라는 임마누엘(Emmanuel) 신앙을 다시 확인하는 데 있다.
복음서별로 예수님을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에 비유하는 상징은 그분의 다양한 정체성을 조망하는 훌륭한 길잡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며, 종으로 섬기신 예수님은 죄인을 향한 헌신과 희생의 모델이 되신다. 인자 예수님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과 동행하시는 인류 보편의 구세주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독수리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적 권능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현대인들에게, 성탄절과 복음서 메시지를 좀 더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이 단순한 교회 전통과 연례 행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실은 우리가 매일같이 성육신 신앙을 붙들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섬기고 용납하며, 세상 속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낼 힘이 샘솟는다.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듯, 우리도 세상의 고통 현장에 들어가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을 흠모하며 따르는 것이 성육신 영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육신은 신앙인에게 매 순간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 사건이다. 2천 년 전 베들레헴 구유에 누이셨던 아기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의 심령 안에 다시금 탄생하여 빛과 진리를 펼치도록 허락하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의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성탄의 신학적 의미”가 삶 속에서 구현되는 구원의 희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이 위대한 선언이, 각자의 일상에서 다시 살아 움직일 때, 성육신은 과거 사건을 넘어 생생한 현재적 구원으로서 빛을 발한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도 성육신을 비롯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 재림에 이르는 전체 구원 계획을 깊이 묵상할 것을 권면한다. 신앙은 한두 번의 축제나 절기 행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육신의 의미를 해마다, 아니 매순간 곱씹고, 그 진리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 변화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성육신을 토대로 한 복음 이해는,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조명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하셨으며, 곧 하나님이셨다는 신앙고백이 우리 안에 선포될 때, 우리는 종교적 의무감을 넘어 기쁨과 자유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어둠과 죽음에서 해방되어 빛과 생명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성탄이 주는 궁극적 희망이며, 이 복음이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보여준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 안에 담긴 은혜와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품게 된다. 인간의 이성적 한계를 뛰어넘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죄와 사망에 빠진 인류를 향한 거룩한 구출 작전이, 태초부터 준비되고 이제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로 완성되어가고 있다.
이 메시지를 붙들고 성탄절을 맞이한다면, 단순히 추운 겨울날의 반짝이는 장식과 산타클로스, 선물을 교환하는 행사 이상의 뜨거운 감격을 맛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이 새롭게 빛날 때, 우리는 그 은혜의 빛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섬기게 된다. 성육신은 역사적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눈앞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신비다.
장재형목사의 성육신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왕적·종적·인적·신적 면모를 하나의 종합적 서사로 엮고, 요한복음 1장이 보여주는 로고스 개념을 통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임마누엘)’ 하나님이심을 각인한다. 죄와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리고 그 빛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열리는 새로운 길(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은 성탄절마다 다시 확증되는 위대한 선물이다.
이 모든 내용을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은 살아 있고 진행 중임을 알리는 고귀한 증표다. 네 복음서의 상징(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여러 각도에서 묵상하게 하며, 로고스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요한복음의 선언은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교사 정도가 아니라, 곧 태초부터 함께하신 하나님이심을 웅변한다.
이 성육신은 인간이 결코 갈 수 없었던 ‘하늘로부터의 길’을 열어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되었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베푸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회개와 감사로 나아가며,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고, 사랑과 섬김의 행위로 그분의 뜻에 동참한다. 그러므로 매해 돌아오는 성탄절은 과거를 기념하는 의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신앙의 근본을 다시 확인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은, 이처럼 성육신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이 단지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마 제국과 그레꼬-로마 철학권, 북아프리카, 오늘날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유럽 전역에까지 복음이 뻗어나간 것은, 이 진리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의 심령을 울리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우리는 그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이란 곧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광채다.
그 광채를 외면하느냐,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은 결정적으로 갈린다.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신적 생명에 참여하는 권능을 얻게 된다. 이것이 어둠과 죽음의 세계를 밝히는 구원의 빛이다. 성육신은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탄절은 그러한 사건을 매년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이다.
네 복음서의 이미지가 제각기 다른 색채로 예수님을 그려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심장부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공통된 메시지가 맥동하고 있다. 이것은 교리나 예식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해석할 수 없는,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구원의 행위다. 21세기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내면의 공허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의 말에 따르면, 성육신은 결코 한 번 읽고 넘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 생애에 걸쳐 묵상해야 할 보물창고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 빛을 얻게 되는 샘물이다. 성탄절을 통해, 그리고 네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도, 종으로도, 사람으로도, 신으로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복음 이해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이 곧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 시나리오가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이어진다는 대서사의 정점 중 하나이고, 성탄절은 그 현현(顯現)의 문턱에서 모두를 초대하는 특별한 축제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는 어둠을 밝히는 하늘의 빛, 만왕의 왕이자 종으로 임하신 주, 모든 인류의 인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동시에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이 “성육신의 경이로움”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성탄절은 온전한 의미를 발한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가 선포하는 성육신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복합적 예수상을 통해 지금의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이제 너희는 그 빛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 이것이 성탄의 본질적 메시지이자, 모든 시공을 초월해 우리를 향해 계속 울려 퍼지는 복음의 초청이다. 그리고 그 초청에 응답하는 삶이야말로, 성육신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서 꽃피우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