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성령 역사 – 장재형목사

1. 초대교회와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2장과 3장, 그리고 4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모습을 확인할수 있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한 두려움으로 충만했고, 그 결과기사와 표적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설명한다. 한편 그 기사와 표적이란 단순히 초자연적인 기적, 예컨대 40년 된 앉은뱅이가일어나는 기적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 곧 소유의 비움과 나눔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사도행전 2장 43절 이후를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는 말씀처럼 당시의 교회가 눈에 보이는 기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이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이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유를 놓아버리고 ‘비움’에 이르게 된 근본 변화를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모습은, 성령이 임재할 때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던 소유욕과 탐심을 극복하게 해주는놀라운 은혜의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 있던 장애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선언하며 그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살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믿음의 풍성함이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함께 나누고 나아가 자신 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함을 이웃과 공유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소유를 ‘전부’로 여기지 않았다. 이 부요함이 바로 초대교회의 활력과 진정한 자유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4장으로 넘어가면,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기사와 표적이 계속됨에 따라 외부의 핍박도 커지고, 동시에교회 내적으로도 더 깊은 기도의 삶이 요청된다. 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고 찬미하며 기도하기에 힘쓴다는 사실은, 교회의 궁극적인 에너지가 사람의 열심이나 단순한 열광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죽음마저 이긴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금도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성도들의 삶을 통해 구현된다면,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떨쳐 낼 수 있다는 것이 장 목사의 설명이다.

초대교회가 부활 신앙을 체험적으로 붙들고,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실현된다는 확신이생겼다. 그 확신이야말로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전의 삶을 뒤집어엎고, 서로 헌신하며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놓아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동력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소유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과 금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도 기뻐하는 자유함이 그들 안에 임했다. 이 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의역동성을 거듭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재산을 나누고 떼어 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끊임없이 인간을 지배해 온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충만한성령의 역사”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나아가 사도행전 4장 32절 이후에 등장하는 바나바라는 인물이 눈에 띈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지만 “밭을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이 당시에 얼마나 대담하고 과감한 것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나바의 헌신이야말로 초대교회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라고 말한다. 바나바는 단순히 재산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했다. 그 고백이 있어서야 비로소 참된 ‘나눔’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이름 뜻 자체가 “위로의 아들”(권위자, 위로자)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 40장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말씀이선포되는데, 바나바가 보여준 삶은 바로 그 말씀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다. 성도들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억압에서 벗어나게되는 미래를 예언했던 구약의 외침이, 초대교회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바나바의 헌신이 증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모든 맥락을 종합하며, 초대교회가 단순한 ‘과거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재 교회가 회복해야 할 참된 정체성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물질과 권력을 나누어 주고, 서로를 위해 살며, 더욱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당시 교인들이 가진 가장 큰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 한 담대한 믿음이었고, 그 믿음이 실제 삶의행위로 나타났을 때 세상은 놀라운 기적과 표적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2.  소유의 비움과 나눔

초대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소유의 비움”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소유를 내려놓기 시작했고, 자신의 재산과 재물을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4:32)라는 구절이야말로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소유가 극복된다”는 표현을 주목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소유욕은 거의 모든 문제의 근본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전쟁과 다툼, 착취와 불평등, 불의 등은 소유에 대한 욕망, 혹은 탐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마치 에덴의 회복과 같이 소유를 뛰어넘는 사랑과 나눔을 실제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폭로해 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때 핵심이 “공유”라고 말한다. 진정한 공유는 단순히 재산을 똑같이 분배한다거나, 소유를 완전히 금지한다는식의 획일적인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성도들이 자기 내면에서부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곧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내 것이라고 주장하던 것”을 풀어놓을 수 있게 된다. 소유를 비우고, 내 것을 너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초대교회가 맛보았던 “성령의 부요함”이라고 장 목사는강조한다.

사도행전 4장 34절 이하에서는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아예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초대교회가 보여 준 가장 극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이유를, “성령 안에서 이미 채워진 충만함”이라 표현한다. 소유를 내려놓게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단순한 열정이나 인간적인 선의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들이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이미 모든 것을 얻었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재물을 움켜쥐지 않아도, 자신의 장래를 걱정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이나를, 나의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곧 모든 교회가 똑같이 재산을 공유해야만 한다는 어떤 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소유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기쁘게 자발적으로 내어놓았고, 그 결과로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을 뿐이다. 즉, 초대교회는 억지나 강요로 기부를 강제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바나바가 자발적으로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자발성’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의 증거라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의 강제로 인해 억지로 헌금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 초대교회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움직였고, 그 결과로 사랑과 헌신이 자발적으로 넘쳐흘렀다. 이것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소유가 극복”되는 건강한 형태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현대 교회가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주의와물질주의가 만연하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본능적 욕구, 그리고 무한 경쟁 속에서 남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나 강하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세상의 흐름에 그저 휩쓸려 간다면, 초대교회의 이상이었던 사랑과 나눔, 그리고 물질적 풍요보다 중요한 영적 부요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갱신과 개혁을 진지하게 원한다면, 장재형 목사가제시하는 “소유의 비움과 나눔”의 가치에 다시금 눈을 떠야 한다. 진정으로 성령에 사로잡히면, 소유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며, 우리는 자유롭게 필요한 곳에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현실적인 필요’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의 공동체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즉, 정말로 궁핍한 형제자매에게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또 어떤사람은 상대적으로 필요가 덜했기 때문에 좀 더 적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듯 실제적인 필요를 중심으로 공유와 나눔이이뤄졌다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나눔은 그저 환상적인 ‘공산주의’나 ‘공동생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사랑이 실제 상황에 적용되어 구체적으로 열매 맺은 모습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필요중심적’ 나눔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본보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초대교회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이야기이다. 사람들은 4장 32절부터 37절에 나타난 ‘소유의 나눔’이라는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너무 가혹하고 어려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 바쳐진거룩한 것”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속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소속된 것이 되는데, 이를 뒤늦게 감추어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하려고든다면, 그 자체가 성령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3.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그리고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

사도행전 5장 1절 이하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의 가장 엄중하고 무서운 권징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전부를 내놓지 않고 일부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 감춘 일부 때문이 아니라, “속임”을 행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래 감추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속였다는 사실이 치명적인 죄가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성령의 사람은 속임을 간파한다”는 것을 부각한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보자마자 “사단이 네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작은 죄악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초대교회 공동체가 지니던 순수성, 투명성,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살던 공교회적 생활방식을 근본부터 위협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 앞에서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는, 그만큼 초대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대했음을 나타낸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한창 흥왕해 가는 시점에서, “거짓”과 “속임”이라는 악이 들어오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물론 우리가 읽을 때 이 사건이 너무 잔혹해 보이기도 한다. “그냥 헌금을 조금 덜 낸 것뿐인데,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라고의문을 품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에 대해, 초대교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강력하게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죄를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 취급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위엄과 성령의 거룩한 능력이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던 시대이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기만하는 일이 곧 ‘성령을 대적하는 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구약의 헤렘(바쳐진 것) 사상, 곧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은 절대 인간이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원리가 초대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바쳐진 소유를 속여서 일부를 취했다는 사실은, 일종의 ‘아간의 범죄’와도 같은 성격을 띈다는 것이다.

아간의 경우를 보면,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전쟁에서 이긴 뒤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는데, 아간이몰래 그 물품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숨겼다. 그 결과 공동체 전체가 패배하고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아간이 돌에 맞아죽고 나서야 다시 하나님의 승리가 임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도둑질하는 일에 대해 무섭도록 진지하게 다루는데, 이는 결국 인간이 생명과 재물을 포함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이런 ‘거룩의 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이사건은,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면 과하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당시 하나님의 위엄이 실제로 체험되던 교회 공동체에서라면 그만큼 엄중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교회가 무엇인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제로 임하는 곳인가, 아니면 단순히 종교 활동을 하고 인간적인 모임을 갖는 장소인가? 만약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면, 교회 안에서는 작은 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교회 안에서 완벽해질 수는없지만, 적어도 죄를 죄로 인식하고 돌이키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강조하며, 오늘날 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진지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 봉사를 하는 이유, 삶으로 예배하는이유가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인지, 혹은 그 안에 교묘한 자기중심적 욕심과 가면이 숨겨져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으로 인해 초대교회 안에는 다시 한 번 경건한 두려움이 임했다. 성경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행 5:11)라고 말한다. 그 두려움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교회를 파괴하는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마음, “우리가 정결해야만 교회가 산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교회가 정직하고진실해야 한다는 이 메시지는, 현대 교회가 무심코 흘려보낼 수 없는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더 큰 기적은 사실 겉으로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한 탐심이 성령의 능력으로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는 태도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물질의 문제가 가장 민감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의 상태인 셈이다. ‘내가 얼마나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소유를 초월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장재형 목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마주할 때,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부분이 없느냐?” 교회 안팎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령을 기만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봉사나 헌금을 하면서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숨은 동기가 있는지, 혹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일부를 감추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 문제를 외면한 채 “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나는 남들보다 더 큰 헌금을 한다”라는 식의 자기만족에 빠진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을 되풀이할 위험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살피고, 성도들에게도 바른 안내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가 물질적인 측면에서 투명하지 못하거나, 헌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지도자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를 도구화한다면, 그것은 곧 초대교회가 보여 준 순수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태도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지도자 스스로가 먼저 바나바와 같이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내려놓고, 온전한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도자는 교인들에게 희생을강요하기 전에, 자신이 진실하게 헌신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초대교회 정신에서 핵심은 “누가 더 많이 드리는지, 누가 더높이 평가받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각자의 필요를 채우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지”에 있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의 가장 빛나는 순간 뒤에 들이워진 짙은 그늘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사건을 통해 초대교회가 얼마나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였는지를 되새길 수 있다. 교회가 성령의 다스림 안에 있을 때, 작은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며, 그만큼 진리와 거룩함을 지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점을 현대 교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재정 비리나 권력 다툼, 교인 간의 분쟁 등이 세상에 드러날 때마다사회는 교회를 향한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소유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과 “정직, 그리고 투명함”이다. 이는 단순히 바깥으로 드러나는 매뉴얼이나 제도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한 내면의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과제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바뀌고, 그때부터 교회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 없이는 교회가교회다워지기 어렵다.

비단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설 때 생겨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한 마음과 한뜻으로 뭉쳐져서, 서로 사랑하며 소유를 통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 쉽게 꺾이지 않지만, 성령이임하면 탐심을 물리치고 오히려 자신을 낮춰 섬기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럴 때 교회라는 공동체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의식을거행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펼쳐지는 장이 된다.

결국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보여 준 ‘부활 신앙’과 ‘성령의 충만함’, 그리고 ‘소유의 비움과 나눔’이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요구된다고 설파한다. 우리는 모두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있고, 그 부활이 이미 시작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재물과 시간, 재능, 건강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삶의 자세가 교회 안에 넘칠 때, 다시 말해 교회가 “정직과 진실”을 회복하고 “두려움과경외”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때, 사도행전이 기록한 놀라운 부흥과 기적이 재현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장 목사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모든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초대교회가 성령으로 인해 변화를 경험했을 때, 가장 먼저드러난 변화는 “소유를 비우고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지닌 부활 신앙은 죽음의 공포마저 떨쳐 버리게 했으므로, 물질적으로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심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나눔’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통해, 이 공동체 안에도 죄의 유혹이 침투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 죄를 단호하게 대면했고, 그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오히려 더 정결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교회가 바로 이런 메시지를 붙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헌금과 재정 문제, 지도자의 청렴성, 교인들 간의 갈등과 불신 등은 결국 ‘소유’를 둘러싼 인간의 욕심과 탐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 안에거하는 교회라면, 마치 초대교회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식하며 두려워하고, 동시에 부활의 소망을 기쁨으로 붙들고, 서로 사랑하며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며, “정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공동체로구나” 하고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초대교회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경고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정직하며 성령에 붙드는 공동체를 이뤄 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리라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아울러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에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결국 초대교회는 기적과 표적이 단순히 외적인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표적과 기사는 더 큰 목적, 즉 사람의 마음과 삶이 거듭나는 증거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결정적인 ‘표적’은, 성도들의 삶이 바뀌어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변모한 사실에 있었다. 우리 역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기대하고, 부활 신앙을 중심에 두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히 엎드릴때, 비로소 소유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교회를 세워 갈 수 있다. 장재형 목사가 되풀이해 설파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초대교회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그저 과거의 유물이나 이상향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실질적으로 부여된가능성이자 사명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여전히 역사하시는 지금, 우리 모두가 그 부름에 정직하게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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